친구들 모임으로 결혼한 친구의 집들이에 참석한 날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모임에서 남자친구가 없는 건 나 혼자였고, 다들 남자친구와 함께였다. 연초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재미있게 집들이 모임을 하던 중, 한 친구가 나에게 소개팅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니? 난 지금이 좋아서 딱히 남자 만나고 싶은 생각 없는데."
"남자친구의 친구들 사진을 봤는데 진짜 너랑 잘 어울리는 사람 발견했어! 내가 꼭 시켜줄 거야."
이 말을 들은 그 남자친구는 썩 내켜하지 않았다.
"아.. 근데 제 친구 진짜 잘생겼거든요... 그래서 좀..."
"네? 근데요? 저도 뭐 어디서 안 꿀리는데요? 저도 어디 나가면 인기 많아요"
말하고 보니 너무 유치했다. 하지만 너무 기분이 나빴다. 잘생겼는데 어쩌라고? 누가 소개해달라고 했나 싶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본인의 친구보다 별로라는 말이라는 거니깐 함부로 처음 본 나를 외적으로 평가한 친구의 남자친구가 너무 별로인 사람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잘생겼으니깐 해줄 거라고."
당시의 난 내가 너무도 좋았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회사에 다시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회사를 그만둔 김에 한 달간 혼자 다녀온 유럽여행의 기운이 채 빠지기 전이라 세상의 기쁨과 행복을 가득 품고 있는 마음 상태였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6개월이 지났고 굳이 남자가 없어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끼며 매일을 웃으며, 내일을 그리며 지내고 있었기에 소개팅을 해주겠다는 말이 그렇게 반갑지도 않았다.
며칠뒤, 내 친구가 남자친구보다 영향력이 있었는지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저 XX소개로 먼저 연락드려요. 김재형입니다. 만나기 전에 어색한 것도 싫고 부담스러운 것도 싫으니까 우리 며칠 편하게 연락하면서 지내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며칠 문자도 하고 통화도 하면서 조금 친밀도를 높였다. 그리고 "편한 오빠, 동생으로 지내보자."라는 말과 함께 첫 만남의 약속을 잡았다.
그도 나도 조심스러웠다. 주선자가 친구 커플. 난 나의 친구, 그는 그의 친구. 모두가 엮여있는 관계.
호프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첫인상은 너무 별로였다.
'첫 만남에 모자라니... 그래도 소개팅인데 좀 예의가 없네, '라고 생각했다.
맥주와 치킨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직장 생활의 버릇으로 나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며 모자 속 감춰진 그의 눈을 찾기에 바빴고, 그는 내 눈을 피하며 대화하기에 바빴다. 어쩌다 내가 안 보는 틈에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얼른 먹고 가야지. 아주 매너가 개똥이네. 잘생기긴 뭐가 잘 생겨. 사람 얼굴도 안쳐다 보고 말이야'
2차를 제안하는 그를 거절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첫 만남 때와는 전혀 다른 연락의 빈도로 나에게 적극적인 호감을 표시하였다.
"아니 근데.. 좀 이상하시네요. 전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자꾸 연락을 하시면..."
"아니요! 전 자주 만나고 싶은데요."
"네?"
"전 엄청 마음에 들었는데, 그래서 내일도 만나고 싶은데 내일은 시간 언제 가능하세요?"
친구가 남자친구의 친구를 소개해 준 거니 그래도 세 번은 만나봐야 친구한테 욕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세 번 만나자고 하면 그중에 한 번 만났다.
한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번은 차를 마시고, 한 번은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는 꾸준히 매일 자주 연락했다. 마치 내가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그렇게 매일매일 만남을 제안하는 그를 거절하고 거절하여 세 번을 채우고 헤어지는 날 첫 고백을 하는 그를 또다시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는 소개팅을 내켜하지 않았던 마음과 비슷했다. 굳이 남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난 지금 이대로 지금의 시간을 보내는 내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꿋꿋하게 계속 자신에 대한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그것들을 혼자가 아닌 본인이 옆에서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구 모임에서 나의 소개팅 이야기가 시작되었기에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소개팅 후기에 대한 이야기는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친구들은 거절한 나를 핀잔주기도 그럼에도 계속적인 호감을 표시하는 그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거기에 키 크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에 대한 친구들의 호감도는 상승세였다.
처음 고백을 거절했지만 그는 계속 데이트 제안을 했고 이번엔 영화도 보고 차도 마셨다. 다음엔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또 그다음엔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차도 먹고 함께하는 시간을 천천히 조금씩 늘려갔다. 나의 속도를 천천히 기다려준 그였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에게로 나를 밀어 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지만 떨리는 말로 두 번째 정식 만남을 제안했고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진짜 서로의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어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이야기했다.
"우린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처음 보는 순간 알았다고. 뭔가 우리에게 특별함이 생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처음 만날 때 머리를 몇 번이나 감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머리 손질을 했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또 감고 다시 하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자를 쓴 거라고. 내가 너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니 너무 떨려서 눈을 피하게 됐는데 얼굴은 보고 싶어서 다른데 쳐다볼 때 힐끔힐끔 쳐다봤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날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머리스타일이었는지 모든 게 다 기억이 난다고 했다. 심지어 호프집의 손님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기억에 선명하다고.
연애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인생 처음으로 시술을 받게 되어 입원하는 일이 생겼다. 같은 병실에는 대부분 할머니들이 계셨고, 20대는 나 혼자뿐이었다. 입원과 동시에 나는 할머니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아가씨, 몇 살이야? 남자친구는 있어?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이런 질문이 통과의례처럼 이어졌고, 나는 낯선 입원 환경과 항문 시술의 부끄러움으로 숨고 싶었다. 집에서 나의 연애를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 남자친구에게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병문안을 오겠다고 한가득 죽을 사서 병원으로 오는 길이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러 온 그는 할머니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머, 총각! 아가씨랑 언제 결혼할 거야? 너무 잘 어울린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 그럼요! 결혼은 올 가을쯤 해야죠. 잘 어울리죠?" 할머니들의 관심이 싫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얼른 가라고 쫓아내듯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는 잠시 산책을 하자며 나의 손을 잡고 병원 주위를 걸었다. 그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방귀가 나와버렸다. "헉!" 하고 놀라는 나를 보며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뭐 어떠냐? 시원하게 껴야 빨리 회복된다며 더 시원하게 껴보라"라고 했다.
그 뒤로 몇 번의 방귀를 더 뀐 후, 그는 퇴원할 때까지 매일 저녁을 같이 먹으러 병원을 찾았다. 할머니들의 관심은 이제 나에서 그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방귀를 튼 이후로, 우리의 연애는 더 자연스럽고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