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재형과의 추억이 담긴 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없는 방, 그와 함께 나눈 대화가 울리던 거실, 아이가 아빠의 품에 안겼던 작은 공간들… 그 모든 게 내게 너무 무거웠다. 마치 그 공간들이 나를 억누르는 듯했다. 또 사람들이 나를 알고 그를 기억하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나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은 점점 내게 짐이 되어갔다. 그들은 나를 위해 한다고 했겠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왔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잊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없는 삶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이사를 결정했다. 그와의 기억이 없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 마음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이사 후 며칠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새로운 동네는 낯설었고 낯선 환경이 오히려 내 마음을 잠시 분리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지 않으니 조금은 가벼운 느낌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지나가는 얼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슬픔도 그를 잃은 고통도 이곳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어.”
나는 매일같이 속삭였다. 마치 자기 최면이라도 걸 듯이. 새로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고 재형에게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곧 익숙함은 찾아왔다. 낯설던 길도 하루 이틀이면 편안해졌고 새로운 집도 금세 일상으로 변했다. 모르던 사이도 아는 사이가 되던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환경을 바꾼다 해도 그가 사라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없다는 사실은 새로운 장소로 도망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았다.
새로운 커튼이 도착했다. 이삿날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커튼 달기는 오로지 나의 몫이 되었다. 커튼을 달기로 결심한 날, 나는 묘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형이 했던 거잖아.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가 신혼집에서 뚝딱거리며 커튼을 달던 모습이 떠올랐다. 웃으며 나에게 “이건 금방 끝나”라고 했던 그의 말도 함께. 그때 나는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쉬워 보였던지 커튼 하나 다는 일쯤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커튼 봉을 벽에 고정하는 과정부터 막막했다. 내가 처음으로 시도한 구멍은 애매한 위치에 뚫렸고 커튼 봉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다. 다시 해보겠다고 애썼지만 무거운 커튼을 들고 벽에 고정시키려는 내 손은 서툴렀고 자꾸만 균형을 잃고 실패했다. 몇 번이고 고쳐 달아보려 했지만 뭔가 계속 어긋나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힘들지?’ 손목에 힘이 빠지고 내 감정도 서서히 지쳐갔다. 처음엔 그저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참아왔던 무언가가 서서히 터져 나오는 듯했다.
결국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커튼도 널브러진 도구도 나 자신도 다 포기한 채 바닥에 앉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모든 게 버거운 건지. 재형이 너무도 쉽게 했던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아니면 내가 그저 부족한 걸까? 내가 그를 잃고 그와 함께했던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이런 작은 일 하나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게 답답했다. 내 인생인데 이렇게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나는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그가 있을 때는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는데 이제는 그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내가 그를 떠나보냈다고 그와의 추억을 피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다고 해서 그가 내 일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부재는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신혼집에서 그가 뚝딱거리며 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겨울이면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추울까 봐 창문마다 꼼꼼하게 뽁뽁이를 붙이고 보일러를 점검하던 그의 모습. 그 작은 배려들이 이제는 모두 내 몫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커튼 하나도 제대로 달지 못하는 나, 그런 나를 비웃는 현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사라지고 그가 없다는 현실에서 나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이런 순간마다 그의 부재는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직접 해보고 나서야 그 안에 담긴 그의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컸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쌓여서 우리의 삶을 만들었구나.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지금에서야 하나둘 알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추억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그 추억은 도망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를 잊으려는 나의 발걸음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이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사 온 이 집에서도 나는 그를 떠나지 못했다. 커튼을 달지 못해 눈물을 쏟아내고 뽁뽁이를 붙이며 그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보일러를 점검하며 그의 빈자리를 다시금 느꼈다. 환경이 바뀌어도 그가 없는 현실은 여전했다.
이 집에서도 나는 나의 상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여기서도 나를 따라왔다. 이사를 와서도 나는 여전히 같은 나였다. 내가 재형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떠난 것이었다. 아무리 다른 곳으로 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곳에서 나는 그저 또 다른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변했다. 나도, 나의 삶도. 그가 떠난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아무리 무언가를 덮으려 해도 그 진실은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나를 마주했다. 낯선 곳으로 도망쳤다고 해서 그가 사라진 고통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결국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라는 말은 나 자신에게 거짓말처럼 던지는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