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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Oct 27. 2024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은


나는 요즘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 기억들이 다시 나를 끌어내릴 것 같아서. 그래서 입을 닫고 지낸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나를 아끼는 사람들도 이제는 나의 침묵에 익숙해진 것 같다. 그들은 더 이상 내게 조심스레 묻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침묵을 견디며 지나치기만 한다. 나 역시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다들 '좋은 뜻'에서 그가 이 세상에 없음을 나에게 상기시키지만 나는 그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유 없이 거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침묵이 때로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그저 아무에게나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전혀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 좋다. 나의 말을 그저 받아들이고 흩날려 버릴 테니. 그럼에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려 하면 다시 삼킨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내 감정이 무언가 변질될까 두렵다. 내 슬픔이 내 약점이 되어 돌아올까 무서웠다.

그 두려움이 무서움이 현실이 되어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아이 유치원에서 들려온 이야기들이 나를 더 깊이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유치원에서 주말에 있었던 일을 매주 월요일 오전 다 같이 모여 한 명씩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고 아이가 전했다. 아이는 매주 “나는 엄마와 ***을 했다.” “이번주에 엄마와 ***에 놀러 갔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아이 친구들이 “넌 아빠 없어?” “왜 맨날 엄마하고만 해?” “야, 그게 아빠 없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금세 아이들의 부모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보미네 아빠 없다던데 진짜야?” “그래, 남편 없다는 소리 들었어, 그런데 정말인가?”라는 수군거림이 나의 귓가에 스쳐왔다.

그들이 무심코 던진 그 말들은 내 마음을 깊이 찔렀다. 내 슬픔과 상실이 어느새 타인의 입에서 쉽게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내 아픔이 그들에겐 그저 가벼운 대화 주제였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사람들의 입에서 내 고통이 이렇게 쉽게 오르내리다니 그건 마치 내 상처가 그들에게는 단순한 흥밋거리로 전락한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외부로 나가면 왜곡되고,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모든 것을 꺼내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낯선 사람에게조차 말하고 싶어 진다. '저기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하고 말하고 싶다.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내가 어떻게 그를 그리워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재형을 알지 못할 테니, 내 말을 그저 흩어져버리는 바람처럼 들어줄 것이다. 그게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감이나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누구였고, 재형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 이야기를 나 혼자 간직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누군가 들어주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생각하게 된다. 내 슬픔이 그들에게 얼마나 초라하게 보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흔한 이야기처럼 들릴까? 아니면 나의 상처가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의 약점으로 변할까? 결국 그들은 내가 겪은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과도한 관심과 반응은 나를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는 더 말문을 닫는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느낀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순간 오히려 나는 더 고립된 기분이 든다. 나는 재형을 그리워하며 매일 그를 기억 속에서 붙잡으려 하는데 그들은 내가 그 기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게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겠지만 사실 그건 그들이 나의 슬픔을 쉽게 해결하려는 방식일 뿐이다. 내가 진정 바라는 건 단 하나, 누군가가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위로하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받아들여주는 것.



나는 이런 모순적인 마음속에서 자꾸 길을 잃는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아무에게나 다 털어놓고 싶다. 이 두 감정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때로는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나와 비슷한 경험 속 상실감을 느낀다는 글을 보면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으니 나의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마저도 나의 마음을 다시 짓밟는 일이 될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페이지를 닫는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의 상실을 공유하기엔 그 상처가 아직 내 안에서 너무도 크고 무겁다. 그 무게를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긴다. 그리곤 다시 말문을 닫는다. 아마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모두 꺼내어놓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누구라도 상관없이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 어쩌면 그 마음에 흔들리며 나는 오늘도 혼란 속에서 나를 더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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