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생존일기
1997년 따스한 봄,
나는 생애 첫 비행기를 탔다.
열여덟 살, 특히 영어와는 담을 쌓던 내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처음엔 유학이라는 단어가 멋있게만 들렸고,
친구들의 부러움도 한껏 받았다.
“민우야, 부럽다”, “우와 남아공이래, 완전 최고인데”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영어 한 마디를 못 해서
입국심사에서 한참을 버벅댔다.
내가 아는 영어는 ‘hello’와 ‘sorry’,
그리고 ‘okay’ 정도였으니까.
며칠 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간 공립학교에서
“히 캔 낫 스픽 잉글리시. 낫 어셉터블.”
딱 잘라 거절당했다.
나를 한 번 쓱 훑어보던 교장의 말투엔
안쓰러움도, 기대도 없었다.
그저 ‘귀찮은 동양애 하나 더 왔군’ 하는
냉담한 시선.
그렇게 난 근처 사립 고등학교에
1년 유급 조건으로 입학을 하게 됐다.
영어도 안 되는데 한 학년 아래 애들과 학교를
다녀야 하니, 자존심이 무너졌지만 선택이 없었다.
근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학교는 인종차별이 유난히 심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흑인 정부에 반발하는 백인 학부모들이 모여 설립한 학교)
하얀 피부에 금발인 애들이 복도에서
나를 쳐다보며 킥킥댔고, 점심시간엔 내 도시락에 몰래 침을 뱉었다. 교실에선 내 가방을 숨기고,
모르는 영어로 나를 흉봤다.
학교 복도에서 내 얼굴에 물풍선을 던지고,
심지어는 소화기를 들고 쏘아대기도 했다.
그 괴롭힘은 아이들에게 재밌는 장난이었고,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매일을 울면서 잠이 들었다.
영어를 못해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못하는 게
더 가슴 아팠다.
3개월쯤 지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정말 더 이상은 못 있겠어.
한국 갈게, 비행기표 살 돈 좀 보내줘.”
엄마는 잠시 조용했다.
“민우야, 우리 돈 없어. 학비랑 기숙사비 다 냈어.
비행기표 못 사. 미안해.”
뚝. 전화기 너머로 조용한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도,
뭔가 하나 뚝하고 부러졌다.
그날 밤, 기숙사 침대에서 혼자 엎드려 펑펑 울었다.
울다가 문득, 그 모든 게 분했다.
내가 영어를 못한 것도, 그놈들이 날 괴롭히는 것도, 한국에 갈 수 없는 것도.
무릎을 꿇고 다짐했다.
“좋아. 한번 붙어보자.
나 진짜 여기서 살아남을 거야. 끝까지 버틸 거야.”
그날부터 매일, 단어장을 들고 영어를 외웠다.
‘homework’, ‘dormitory’, ‘laundry’ 같은
필요한 단어부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도 몰라도, 그냥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기숙사 룸메이트 ‘웨인(Wayne)’이 말을 걸었다.
“민우, 숙제 좀 도와줄까?”
룸메이트가 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처음 내게 말을 건 거다.
나는 어설픈 영어로 바로 대답했다.
"오케이"
웨인은 웃으면서 내게로 왔고, 내 숙제를 도와줬다.
“넌 되게 좋은 애 같은데, 좀 짠해.”
그날 이후, 웨인은 나를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다.
단어장에 나온 예문을 같이 읽어주고,
모르는 숙제는 천천히 설명해 줬다.
하루는 “Do you like cricket?"
크리켓을 좋아하는 웨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크리켓이 뭔지도 몰랐지만,
웨인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예스!” 하고 대답을 했다.
다음날 방과 후,
웨인은 나를 크리켓부 훈련에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친구들, 월터, 앤드류,
그리고 에드가를 만났다.
말은 안 통했지만, 배팅연습을 같이 하면서
서로 웃는 우리들 사이에 뭔가 통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날 이후,
기숙사에 같이 지내는 에드가는
내 문법을 수시로 봐주었고,
앤드류는 주말에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주었다.
그리고 월터는 나를 괴롭히려는 친구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줬다.
“민우 건드리지 마. 내 친구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