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매출의 전쟁 속, 솔직함과 정직의 무게를 배웠다
카운슬러의 하루는 전쟁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날까지 확보한 예약 건수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적힌 예약 숫자가 부족하면
팀장의 개인 면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출근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고,
전화기를 붙잡은 채 하루를 보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은
카운슬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전투 신호 같았다.
예약을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은 100통의 전화 중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어떤 날은 우연히 단 두 번의 통화로
약속을 잡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전화는 멈출 수 없었다.
고객을 붙잡지 못하면 곧바로 성과에 반영되었고,
성과가 떨어지면 팀장의 눈빛은 차갑게 바뀌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고 싶어,
목이 잠기도록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내가 상담하는 고객은 크게 두 부류였다.
나처럼 1일 무료 이용권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클럽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가격을 물어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맞이해 시설을 안내하고,
가입까지 이어가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하지만 신입에게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오래된 베테랑 선배들은 충성 고객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고,
명절이면 고객분들께 선물을 보내고,
그 고객 분들은 주변 지인 등을 선배들에게
소개해 주면서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아직 그런 기반이 없었기에,
내 몫은 오로지 전화와 발품이었다.
압구정 피트니스 클럽의 목요일은 특별했다.
클럽은 매주 목요일마다 프로모션 행사를 열었다.
어떻게 매주 그런 이벤트를 이어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지만,
그때는 “또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전부였다.
매출목표는 평소보다 두세 배 높게 잡혔지만,
신기하게도 매번 달성되었다.
그날만 되면 상담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매출 그래프는 눈에 띄게 치솟았다.
매출은 곧 돈이었다.
카운슬러 대부분은 기본급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든 시선은 인센티브에 쏠려 있었다.
많게는 기본급의 4~5배를 인센티브로
챙기는 사람도 있었으니,
모두가 숫자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매일 상담 테이블이 모자랄 정도로 상담이 많았고,
나도 그 열기 속에 휩쓸려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어느새 나의 하루는 숫자와 예약,
매출과 인센티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작은 기회가 찾아왔다.
클럽에는 생각보다 외국인 고객이 많았는데,
지배인님이 내게 그들을 맡기셨다.
남아공 유학 시절 다져온 영어가 통했기 때문이다.
외국인과 상담할 때면,
여유 있고 당당한 민우가 나타났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곳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목요일 프로모션이 한창이던 어느 저녁이었다.
밤 9시가 다 되어,
한 여성 고객이 리셉션을 통해 상담 요청을 했다.
평범한 차림에 백팩을 멘 모습,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 사수인 폴 선배가 상담을 맡았고,
나는 옆에서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다.
시설 투어가 끝나고 상담 테이블에 앉아
가격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는 먼저 높은 정가를 제시한 뒤,
고객이 가격을 부담스러워하는 시점에
할인 혜택을 주는 방식이었다.
폴 선배는 정석대로
고객분에게 정가를 말씀드렸다.
여성 고객은 잠시 망설이더니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웅, 가격이 천만 원인데, 해도 돼?” 하고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이 조건으로 회원권 두 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객이 제시한 카드는 현대카드 '블랙'.
순간 폴 선배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멍해졌다.
말로만 듣던 '블랙' 카드를 보는 것도 놀랐지만,
그대로 정가로 결제를 받을지, 아니면
할인 사실을 알려야 할지 갈림길에 선 것이다.
폴 선배는 긴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정가에서 할인이 들어갑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객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 다른 혜택을 요청했다.
결국 폴 선배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PT 10회를 추가로 제공했다.
당시 클럽에는 PT 트레이너만
50명이 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성 고객은 만족해하며,
자리를 떠났고 이후에도 자주 클럽을 찾았다.
그리고 운동하러 올 때 가끔은 케이크와 프레즐을 들고 와 폴 선배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날 나는 한 가지를 확실히 배웠다.
사회생활에서 솔직함과 정직은
때로는 손해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큰 무기라는 사실이었다.
숫자와 매출, 인센티브가
하루의 전부처럼 보이던 압구정 피트니스에서,
정직은 오히려 사람을 붙잡는 힘이었다.
폴 선배의 선택은
단순히 매출을 올린 것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고객은 만족했고, 신뢰는 쌓였으며,
우리는 말도 안 되게 또 한 번 목표를 달성했다.
압구정 피트니스에서의 하루는
늘 치열하고 정신없었다.
전화기와 예약표, 상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와 카드 단말기가 나의 전투 무기였다.
그러나 진짜 무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솔직함과 정직.
세상은 화려하고 복잡했지만,
결국 가장 단순한 진심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무게를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
나는 카운슬러라는 직업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다음 회 예고
<압구정 건물주의 스케일〉
압구정에서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
찐부자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