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ck split
Sep 21. 2020
비행근무를 하다 보면 철 모르는 사람이 된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아지랑이가 가물 거리는 봄날에도, 가방을 끌고 비행기에 오르고 나면 금세 계절을 잊어버린다.
목적지의 계절이 더 뚜렷이 기억되는 이유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계절이 정반대인 남반구 쪽으로 가게 되면 그 아쉬움이 가끔은 멘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국의 여름에 어떤 나라는 가을 날씨이거나 겨울에 가까운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에 비행 전 준비를 하는 습관이 없거나 게으르면 필시 이런 멘붕의 경험을 갖게 된다.
아예 게으른 승무원들은 해외에서 외출 조차 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방에는 늘 같은 옷이 있거나 그냥 실내복만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선배 남승무원 몇 명과 여승무원 중에도 더러 있다.
주니어 때 알고 지내던 여승무원은 스위스 5박 6일 비행에 한겨울에 아무 준비 없이 샌들 한 켤래와 바람막이 점퍼 하나만 가지고 왔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융프라우 투어를 가면서 핫팬츠에 바람막이 그리고 샌들을 신어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렇듯 지역을 옮기는 것만큼 계절을 옮겨 다니다 보니 승무원들에게는 계절에 맞는 감성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언제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필요에 의해 T/F 팀에 차출되어 2년 전, 봄 기간을 지상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4개월 정도의 기간이었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오롯이 봄을 느껴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한 손에, 때 이른 아이스커피 한잔을 들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다 보니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게 되고, 일주일 정도의 기간에 피고 지는 목련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봄꽃들을 보고 있자니, 승무원들의 계절 없는 시간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봄'이라는 뜻이 ' 보이기 시작한다'라는 의미를 어떤 책에서 읽으면서 인간의 인생이 계절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느꼈다.
그렇게 봄을 알게 되면서 생긴 마음의 여유가 아마도 지금의 상황에 대한 방패가 되었다는 것을 오늘 가을이 다가오면서 깨닫게 되었다.
철(계절)모르던 승무원 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봄을 알게 되고, 지금 현재 코로나로 인한 우울한 일상 속에서도 가을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다.
도심 가운데에 생존이라도 하려는 듯 거실 반대편 창밖에 보이는 작은 논에서는 이미 가을걷이가 끝났다.
지루한 최장 기간의 장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하늘의 하얀 구름은 더없이 풍성해 보인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면 비행근무로 인해 저하된 면역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재채기부터 나온다.
인류에겐 재앙으로 다가온 코로나와 무관한 듯 가을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직 긴팔을 입기엔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할까봐 젊음을 자랑하고픈 중년의 오기만 남아있는 어느 가을 아침에 다시 한번 계절을 느낀다,
누구는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 하지만 그러기엔 현대인에게는 너무 많은 고민이 있다.
다 잊어버리고 여행이라도 가고 싶지만 가장의 무게는 가을을 느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통해 듣는 음악보다 손바닥 만한 작은 라디오에서 젊은 시절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주변을 살펴본다.
누가 보지 않았을까 하는 중년의 소심함이 가을을 한층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비행 중에 느끼지 못했던 가을을 느끼게 해 준 현 상황이 고마운 건 분명한데, 마스크를 벗지 않는 한 백 프로 만족스럽진 못하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행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