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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Jul 08. 2020

생각편의점 청소 2

생각편의점

생각편의점 청소 2





그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그대에게 구속되기를 바란다면, 언제든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그의 권리도 인정해야 할 터다. 그럴 수 없다면, 사랑하기엔 그대가 너무 어리다. 


한편, 사랑이 성으로 이어지고, 성이 사랑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대가 성을 사랑과 동의어로 쓴다면, 솔직히 말해, 사랑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 



사랑은 사람의 문제다. 남녀의 문제라고 알고 있다면, 그대가 지금까지 남자, 아니면 여자로 살아온 것일 텐데, 그대가 가질 수 있는 삶의 반은 버리고 산 것이 된다. 



알다시피, 성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동물이 그렇게 산다. 동물을 재단하는 게 아니다. 인간도 그 범주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렇다고, 인간이 동물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역시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를 한다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고, 그대가 그래야 했다면, 그대와 그는 이전의 대등한 관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 사랑을 접기 좋은 때가, 그때다. 한 마디로, 용서와 이해가 그에게 습관이 되기 전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하고, 사랑을 버리는 것도 같다. 사랑해서 사랑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삶의 덤에  불과한 사랑에 구속되고 만다. 사랑에 '의지'가 섞이면 폭력이 되는데, 오늘도 어디선가 그를 사랑해서 용서하고 이해해야 할 그대의 삶을 상상하는 건, 그대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전혀 즐겁지 않은 일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폭행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하지만, 대개 그 '때'를 놓치고 만다. 사랑에도 적용되는 '수익자 부담 원칙'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이해는 수혜자만이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그것이 단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거라는 무수한 예약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대는 신이 아니다. 용서와 이해는 신에게 맡긴다. 그래야 그나마, 그를 한 때 사랑했던 사람으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에도, 사랑에도 

바보가 된다 

아무래도 후회가 없을 수 없다면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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