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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Jul 27. 2018

소확행

생각편의점


소확행




삶이 나를 기꺼워해서 특별히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없는 터에

내가 삶에 눈살을 지푸리는 것보다

당장의 나를 받아들이고,

타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나를 내게 돌려주는 것이

소확행인가 싶다


그 태도는 사랑을

제대로 하는 <나>와
같다고 본다


<네>가 무엇이든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크게 염두에 둘 일이 아니라는

자기애의 <나>의 태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라 태도와 같


JTBC의 뉴스룸처럼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너와의 사랑에서 내가 불행한 때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때라는 것이

소확행이 가진 태도일 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나의 심로(心路)를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소확행 가운데 하나를 잃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내 안에 똬리를 튼다면

그것은 나의 행복을 죽이는

몰확행(歿確幸)이 분명하고,

혹시 사랑으로 아프고, 그 아픔이

<내>가 아니라 <너>때문일 때,

소확행을, 나아가 내 삶의 재미를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나를 사랑하나?>라는 질문은

소확행의 종점에서 갖게 되는 것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나?>라는

질문에 비해 훨씬 사소해야 한다


소확행이 아니더라도

내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나를 즐기는 영리한 짓이라 볼 때

못 즐기는 것은, 다른 말로,

삶이 유쾌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의 시선>, 혹은 <너의 사랑>에

나를 맞추려는 <나>의

노예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너>가 그대의 삶이든, 연인이든,

이름 모를 풀이든 마찬가지다

혹여, 잠에서 깬 그대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힐 때라도

이불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보려 한다면 이불의

좀 더 나은 주인일 수 있지 않을까 )


<그대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어떤 노랫말은, 아쉽게도, 그대

사랑받지 않을 수도 있기에

주장하는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의 여부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다

왜 내가 그의 사랑 때문에

나를 앓아야 하는가


(이불이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하는 것보다

내가 이불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너의 사랑은 네가 하게 두고

나의 사랑은 내가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소확행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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