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의점
삶이 나를 기꺼워해서 특별히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없는 터에
내가 삶에 눈살을 지푸리는 것보다
당장의 나를 받아들이고,
타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나를 내게 돌려주는 것이
소확행인가 싶다
그 태도는 사랑을
제대로 하는 <나>와
같다고 본다
<네>가 무엇이든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는
크게 염두에 둘 일이 아니라는
자기애의 <나>의 태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라는 태도와 같다
JTBC의 뉴스룸처럼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너와의 사랑에서 내가 불행한 때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때라는 것이
소확행이 가진 태도일 터다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나의 심로(心路)를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소확행 가운데 하나를 잃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내 안에 똬리를 튼다면
그것은 나의 행복을 죽이는
몰확행(歿確幸)이 분명하고,
혹시 사랑으로 아프고, 그 아픔이
<내>가 아니라 <너>때문일 때,
소확행을, 나아가 내 삶의 재미를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나를 사랑하나?>라는 질문은
소확행의 종점에서 갖게 되는 것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나?>라는
질문에 비해 훨씬 사소해야 한다
소확행이 아니더라도
내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나를 즐기는 영리한 짓이라 볼 때
못 즐기는 것은, 다른 말로,
삶이 유쾌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의 시선>, 혹은 <너의 사랑>에
나를 맞추려는 <나>의
노예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너>가 그대의 삶이든, 연인이든,
이름 모를 풀이든 마찬가지다
혹여, 잠에서 깬 그대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힐 때라도
이불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보려고 한다면 이불의
좀 더 나은 주인일 수 있지 않을까 )
<그대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어떤 노랫말은, 아쉽게도, 그대가
사랑받지 않을 수도 있기에
주장하는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의 여부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다
왜 내가 그의 사랑 때문에
나를 앓아야 하는가
(이불이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하는 것보다
내가 이불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너의 사랑은 네가 하게 두고
나의 사랑은 내가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소확행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