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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Dec 18. 2019

치정(癡情) 유감(연말 정리)

생각편의점


치정 유감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여자가 아무리 사랑스럽다 해도 거리를 두게 되는 법이다."

"요즘 같이 먹고살기도 힘든 때, 뭔 사랑 타령이냐."


앞의 것은 무라카미 하루끼의 어떤 단편소설에서 주인공 '나'라는 사내가 하는 독백이다. (문장 구조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슴푸레 의미만 새겼다.) 뒤엣것은 주위에서 흔히 듣는 소리이다. 언듯, 타당하다 그러나, 그대의 시각도 비슷하다면 문제다. 그대가 그대를 사랑하는 한 그렇다.


오히려, 먹고살기 힘드니까 사랑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대가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대에게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유아적이다.  어른의 사랑을 할 만큼 어른이 되지 못한 탓이다. 주머니 걱정을 하는 것은 좌판에 펼쳐 놓지도 않은 채 사랑을 사게 만들고 싶은 저잣거리 호객꾼의 조바심. 그대의 사랑으로 그를 가두려고 하거나, 그대의 사랑의 틀에 맞추려고 하거나, 그를 사육하려는 욕구를 품은 탓으로 보인다.


즉물적인 관능의 속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즉물적이 아닐 때 기막힌 맛을 낸다. 주머니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맛이다. 사랑은 그대의 주머니 사정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한다. 주머니 걱정은 그대가 하는 사랑이 기회주의적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백이다. 똑똑한 그 앞에서는 삼가는 게 좋다. 그대가 하는 하찮은 사랑이 드러날까 두렵다.




그와 그대 사이에 두기에 좋은 건 사랑이다. 그를 그로 본다.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간적 약점을 제외하면 더하거나 뺄 게 없다. 그의 삶이 당연히 사랑스러워진다. 그를 사랑하는 '나'는 온전하지 않다. 그러나 곧, 자신의 온전하지 않음을 망각하고 그를 꽃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예를 들면, 그대가 '노이'님을 사랑하거나, '화양연화'님을 사랑하거나, '박재우'님을 사랑하거나, '박빛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대가 즐겁기 때문이다. 그대의 사랑이 그에게 즐거움이 될지, 괴로움을 안길지 알 수 없다는 건 안중에 없다. 


그대의 사랑은 사적 즐거움으로 시작된다. 그의 즐거움을 즐기려고 사랑이 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대의 사랑이 그가 그대를 사랑해야 할 치명적 이유가 되지 않는 이유다. 그의 사랑이 그대이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대에게 한정되어야 할 당위가 없다. 그대여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도 없다. 그는 그대를 위한 꽃이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그대 자신을 달콤하게 한다. 똑같이, 그가 하는 사랑이 그를 달콤하게 하기 때문에 그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일 터다. 그를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그에게 행복이 된다고 실토할 때 그의 불행을 막기 위해 그대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느끼는 달콤함을 그대도 기꺼워해야 한다. 그래서 어쩌다, 그대와 그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오면, 늦은 밤 그가 지나다니는 밤길을 밝혀주는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가로등에도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싶게 되는 법이다.


사랑한다면, 가슴을 앓거나 배를 앓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신이 괴로워하거나 인간을 앓는 이유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져서 신이 되려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지만, 제대로 사랑에 빠진 인간이 때로 신보다 낫다.

(인간이 신보다 나은 경우가 두 가지 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다. 그대는 그를 아무런 이유 없이, 또는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으며, 이유가 있다면 삶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다. 신은 꿈도 꾸지 못하는 열정이며, 능력이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그대가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은 심리학자 폴 블룸의 관찰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그대를 사랑할 이유가 없을수록, 그가 자유의지로 그대를 사랑할수록 진하다.


왜 그의 사랑의 향방에 그대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가. 그는 그의 사랑을 하게 하자. 그가 그대를 마주 보며 커피를 나누지 않아도,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도 그대가 그를 사랑하는 한 그 사랑은 그대의 것이다. 그를 그대의 짝이라고 우기지 않는 한 그 사랑이 그대의 먹고살기 힘든 삶을 견뎌내는 이유를 하나 더 마련해 줄 터다.




치정의 치(癡)는 불교에서의 인간이 가진 여섯 가지 근본 번뇌 중의 하나로, 어리석음을 말하며, 치정은 사랑으로 인해 어지럽게 휘둘리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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