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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Jan 02. 2020

가까운 사이

생각편의점

가까운 사이



마주 보는 사이가 가까운가, 포옹하는 사이가 가까운가?


생각편의점에는 다양한 질문이 던져지며, 상식적인 질문도 들어온다. 그런데, 이미 질문의 답을 알고 묻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대가 미래 지향형인가, 현실 안주형인가를 확인하려는 심리테스트가 아니라면, 위의 질문은, "인간이 가까워지는 절차가 그럴 뿐, 마주 보는 사이보다 포옹하는 사이가 더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에게 최선인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닐까.


포옹하는 때는 대개 마주 본 뒤다. 마침내 포옹하기 위해 다가갈 때, 우리가 주저나 망설임을 보이는 이유가 적어도 두 가지는 될 듯하다. 우리의 순수함이나 결벽성이, 포옹을 상대에 대한 견제의 포기나, 전적인 수용으로 받아들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 듯싶다.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는 것을 우쭐댈 만큼 역설적으로 절절한 포옹을 필요로 하며, 포옹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와 그 부모 사이거나, 유년을 같이 보낸 동료 간의 어떤 상황에 따른 포옹은 제외하고 묻자. 왜 우리는 포옹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린 채 다가가는 그 몇 초의 시간조차 계면쩍어하는 걸까? 달리 물으면, 왜 마주 보는 것을 회피하면서 서둘러 포옹으로 넘어가려는가?  


대개 아는 이야기이지만 앨버트 메러비언_Albert Mehrabian의 7%-38%-55% 소통의 법칙에 따르면, 신체언어는 전체 소통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마주 보는 것으로 그대의 정체가 한눈에 드러나는데, 그것을 막는 가장 좋은 도구가 포옹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주 보는 것에서 드러나는 정보를 차단할 수 있으며, 수상한 태도나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낌새도 묻을 수 있다. 포옹이 껄끄러운 것을 감추거나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이유다.


예를 들어, 그 자신의 신체언어(전체 소통의 55%)를 차단한 채, 귓가에 '사랑해!'라는 한 마디(언어에 의한 소통, 약 7%와 음색에 의한 소통, 약 38%)를 던지는 것으로, 그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그가 그대의 이상형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설마, 그리 쉽게 매혹되겠나 싶지만, 그건 그대가 그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위 의문의 답은 이거다.

 

그 몇 초의 시간이, 말 그대로 <마주 보아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면 상황으로 그의 신체언어를 확보하는 것은 그대가 셜록 홈즈나 미스 (제인) 마플 또는 에르큘 푸아로가 아니어도 제 발 저린 그를 읽게 해 준다. 그대가 그를 마주 보는 것이 관계의 시작일 때 그의, 그대와의 관계도 시작이 된다. 그의 사랑, 그대의 사랑, 순수와 선의, 적대감 그리고 때로는 표정 뒤의 맨얼굴까지 드러낸다. 

이미 신체언어를 읽은 그대는 그의 언어와 음색의 영향력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 여유가 불안한 그가 어떻게 그대를 서둘러 포옹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치명적 영향 때문에 포옹은 그대의 허락이 있을 때 이뤄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행위와 마찬가지로 포옹이 대체적으로 포옹하려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그대 자신도 애정을 담은 포옹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 자신이 먼저 원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거다. 이미 포옹을 허락했다고 해도, 그대가 내준 포옹의 허락이 온전히 그대의 책임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편, 그대를 마주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옆모습에 그대의 시선을 묶어두려는 그는 자연스럽지 않다. 곁눈질을 하는 그나, 무심히 고개를 들었을 때 옆얼굴을 자주 보게 되는 그는 무시하자. 그는 편의적 애정 표현 중이다. 그대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대의 사랑을 받으려는 비겁자이기 쉽다.


그렇다면, 그를 받아들일 때는 마주 봐야 하며, 포옹은 그대가 원할 때만 한다는 원칙이 필요하다. 또한, 그대가 그를 오래 사랑하려면 포옹보다는 마주 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관계에서는 그대 옆에 있는 그보다 그대 앞에 선 그를 살피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Et tu, Brute? (Brutus, you too?_ 브루투스, 너마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다. 시저가 브루투스의 칼을 맞고 외친다. 브루투스는 시저가 항상 옆에 두고 극진히 아꼈던 젊은 친구, 동지이며, 제자인 동시에 양자였다. 그 브루투스까지 자신의 암살에 가담하여 칼질을 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다른 암살자들에게 반격을 시도하려던 시저는 삶의 의지를 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대에게 가장 비정할 수 있는 이는 그대 옆에 있을 수 있는 그다. 치명적인 타격은 그대 옆에서 온다. 가장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그대의 옆구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포옹이 필요하다. (포옹으로 한 삶을 얻은 듯한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같잖은 주장으로 들릴 텐데,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주 본 뒤에 이뤄지는 포옹이 자연스럽다면, 마주 보는 시간이 포옹보다 충분히 길어도 문제가 될 게 거의 없다. 포옹할 사이라면, 포옹하게 되어 있다. 안달할 게 없다. 마주 보는 시간은 길수록 좋고, 포옹은 짧을수록 좋다. 목표의 성취보다 그 목표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희열이 더 크듯이, 포옹 자체보다 포옹하리라는 기대감이 주는 행복이 크다.


흔히 마주 바라보는 것을 적대적으로 여길 수 있는데, 마주 본 뒤에야 포옹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대를 거부할 그와 그대를 받아들일 그가 그대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 둘 모두, 적어도 악의를 가진 채 그대 옆에서 그대의 애심을 파고들어 경계를 허물고 서 있는 그보다는 낫다. 그래서, 그대를 진정 사랑하거나, 사랑하려는 그는 그대 옆에서 그대와의 친밀도를 자랑하는 그보다는 그대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그대를 함부로 마주 바라보는 이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게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미 그를 연인으로 두고 있거나 반려로 둔 경우, 그대가 항상 하게 되는 실수는 늘 옆에 있다고 그를 마주 보려 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대를 마주 보려 하지 않는 그를 방관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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