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울을 보면, 보여야 하는 것은?

모르면아픈사랑Q

by 어뉘

4. 집 밖으로 나서기 전 거울을 본다면, 그 안에서 보여야 하는 것은?



가. 하고자 하는 목적이나 일에 맞는 차림을 하고 있는 나

나. 눈에 띄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신경 쓴 나

다. 타인의 눈에 콩깍지를 씌울만한 모습인 나

라.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나





긁어 부스럼

적절한 답은 이미 다른 글에서 누설된 적이 있다. 거울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더 나은 모습을 갖고자 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가.

이미지가 굳어진 차림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차림이라는 것은, 결국, 시절과 우연이 겹쳐 그대의 손에 들어온 것들의 집합이다.

게다가, 그 견해에는 당착이 있을 수 있다. 객관적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 '나'가 있는 한, 우리는 '나'뿐이고, 그게 유일하다. 적절함을 견줄 기준도 그대의 눈이라면, 그대가 납득하고, 좋아하는 차림이면 될 터다.


차림 가운데 그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대 자신뿐이다. 나머지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사소한 대가를 치르고 얻는다.

우리 자신만큼 다양하고, 개성적인 건 없다. 어떤 목적이든 그에 맞출 수 있는 차림은 그대 안에 있다. 그대 자신은 누구도 모방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지 '가'를 위해서 거울을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

유니폼이 아니라면, 요구되는 태도는 없다. 그대가 비판받을 일이 없다. 거울 속의 그대를 보며, '이게 나야!' 할 수도 있고, '이 정도면 됐지, 뭐!'라고 할 수도 있다.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어서 타인의 시선과 타협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우리 자신이다.

때로, 거울 속의 그대가 서먹서먹하게 느껴지는 건 그대의 눈이 아니라, 그대의 뇌가 그대를 보는 까닭이다. 눈이 보는 그대와 뇌가 보는 그대가 다를 수 있다. 뇌는 그대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도, 거울을 처음으로 이해하며 들여다본, 아홉 살의 그대를 보게 할 수도 있다. 그대는 온전한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다. 이 선택지 역시, 정답과는 거리가 있다.



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그런데, 거울 속 그대의 모습과 그대가 찍힌 사진은 다르다. 대체로 거울로 보는 그대가 더 사랑스럽다고 느낄 텐데, 우리의 눈은 제법 솔직한 편이지만, 뇌는 그대의 눈을 통해 그대의 모든 결점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하는 탓이다.

(그래, 우리는 흘러간 자신의 '화양연화'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것이 남의 눈에 콩깍지를 씌우려는 목적이라면, 그대는 그 자신보다 그들을 더 알아야 한다. 아무런 배경 없이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매력을 만들고, 보여줘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그들도 그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자신만의 매력이라는 것을 뽐낸다는 건데, 그런 그들의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건 얼핏 생각해도 쉽지 않다. 한 마디로, 그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택지 ''도 적절하지 않다.


게다가, 자신의 매력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지목해서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지 않는 한, 만인은 심리적 '방관자 효과' 그대로 그대의 독특한 매력을 일반화하기 쉽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세상엔 그대가 그대 하나뿐인데도 말이다.



라.

보통,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에서는 지문이 긴 것이 정답이기 쉽지만, 이 문제는 옳은 것을 고르는 문제로, 가장 짧은 게 그럴듯한 정답이다.


우리는 '나'를 꾸민다. 그런 우리가 거리를 '시크'하게, 또는 무심한 듯 걷고 있다고 해도 격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대의 매력은 그대가 아니라 그가 찾아주는 것이며, 그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그대가 아니라, 그다. 그 밖의 매력은 그대의 구상에 불과해서 거의 쓸데없다. 매력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그대 자신의 눈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에서 본 주장일 뿐이다.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그만이 알아본 그대의 매력은 그냥, 매력이 아니다. 보통, 매혹을 동반한다. 매력은 만들어서 즐기는 게 가장 달다. 그가 그대에게서 찾아 만들어주는 매력이 그렇다.


골프의 스윙이나 볼링의 어드레스(Address)에 이은 릴리즈(Release) 중에 인간의 몸과 어울리게, 다시 말해 자연스럽게 흔들수록 각각의 공을 원하는 곳에 보내기 쉽다. 아니면 옆으로 새거나 거터로 빠져 버리고 만다.


그때의 자연스러운 동작은 안정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상투어에는 이 '자연스러움'을 선호하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매력을 읽는 습관이 담겨있다.


그대가 매력이라 자부하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때, 그는 그대의 옷깃에 붙은 한올 머리카락 덕분에 인간을 사는 그대의 사랑스러움, 인간적 매력, 혹은 영악해진 현대사회를 사는 순수를 읽을 수도 있다.



여하튼 관점을 '나' 이외로 두면, 나에게는 여유가 생긴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게다가 그대를 사랑하려고 그대의 매력을 찾고 있는 그가, 그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대의 눈치를 보는 그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일 터다.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의 매력보다 그가 찾아준 나의 매력이 나를 즐겁게 하는 법이다. 사랑은, 결국 내가 그를 즐기는 것이다. 내가 즐기는 것을 그 역시 즐기게 될 때, 다시 말해 그가, 내가 사랑하는 그 자신을 즐기게 될 때 찐한 사랑이 될 터다. 그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더 나은 사람이려고 할 테니까.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사랑받는 것과 달리 우리의 삶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삶에서 누군가를 돌봐주는 삶으로 바꾸며, 삶의 주도권을 우리에게 준다.)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면, 거울 속에 있는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사람의 모습인지 살펴야 한다. 아니면, 주인의 눈치를 봐가며 꼬리를 흔드는, 적어도 한 번은 버려졌던 애완견처럼 그저 사랑을 구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왜 나 자신에게 그렇게 안달했을까?"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사랑 거지'로 산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 다만 훗날 사랑해 달라고 졸랐던 그대를 반추하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을 터다. 그것도, 스쳐간 삶의 부스러기처럼 그대를 추억하거나 제대로 기억이나 해줄지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말이다.


한편, 주위에는 그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만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너는 사랑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알려줄 정도로 착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 착함은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려로, 대체로 착해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해.)

<흔한 착각>에서 소개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에서 멜빈이 캐럴에게 들려주는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요구된 것이지만, 사랑에 빠진 이의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기만으로, 그가 그대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 자신은 그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속물은 되지 않아야 한다. 그의 모멸감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는 비난에 가슴이 버거울 터다.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답은 '라'라고 본다. 사랑하려는 나.


(그 시작은 집 밖으로 나오면 흔히 보이는, 낡은 유모차나 쇼핑 카트를 끌거나 밀며 폐지를 줍고 있는 허리 굽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부터다.


폐지 줍기가 그의 이익을 위해서이며 그의 수입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그게 우리에게 당연하지는 않다. 그의 사정이 그럴 뿐이다. 한편, 처치 곤란한 그 폐지를 버리고자 할 때 몇 백원도 아닌, 단 몇 원 가치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내가 그를 '쓰거나 부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게 내 사정이다. _검색해 보니, 요즘 폐지 값이 kg에 130원 정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사정을 이용해 내 사정을 해소할 권리나 자격은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사정이 열악하다고 그 사정에 우리가 얹혀 그의 작업을 당연시하는 건 우리의 여러 가지 '거지 근성' 가운데 하나랄 수 있겠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혜택이 훨씬 크다. 현실이 그렇다면, 마음으로나마 그들이 감사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 당연한 것은, 어찌 보면, 공기뿐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위협받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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