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엔, 그래도

생각편의점

by 어뉘

빗줄기엔, 그래도




입버릇처럼 쓰면서

그래야 하지 않나 했던

정의와 공정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속내와,

그 대척점에

무엇이 있는지를 마음과

몸으로 배우는 요즘입니다


곧 이때를 반찬 삼아,

혹은 안주 삼아

눈빛을 반짝이며

입에 담을 때가 올 겁니다


과거가 된 오늘이

무력감으로, 쨍한 분노로

채워져 있을수록

미래의 현재가 소중해지겠지요


덕분에 삶이 막힌 듯하지만,

마음이라면 모를까

삶이 막힌 적은 없습니다


흔히, 갇혀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면,

그대가 갇힌 것입니다



한 해 전까지도 우리는,

어떻게든 이 사회가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귀중한 생명을 가진

인간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든 죽어도

사망 +1로 기록되면 그만인

하찮은 인간으로 살게 된 듯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을 말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조롱처럼 느껴지는, 꽤

어려운 때로 여겨집니다


"너희 각자나 잘 살아, "

라는 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얼개인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런 우리는

'나'를 잘 모르는 덕분에

나를 살만하게 꾸미면서

때로 웃고, 때로 울면서

내가 정의한 나를, 나처럼 삽니다

그러기를 주저하지 않는 건

생존본능 덕분일 겁니다


작가에 대한 거부감으로

입에 담기가 껄끄럽지만,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태처럼 '그럴 수 있는' 자리,

또는 그 상황에 대개의 우리가

무관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서

그렇게 사는 인간에게

동정이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무시하지 못하는 패배감 때문에

주위를 정리하지 못하며

오늘을 피곤하게 느낍니다


덕분에,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교실에 앉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말아먹는

공갈이나 협박, 협잡하지 않고

오늘까지 온 것으로 보아,

우리가 그들과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꽤 소중한, 삶의 자산이 될 겁니다




이 시절과 결이 다르다 해도

17세기를 잠깐 살아냈던

김성탄*이 나열한 33가지의

사소하지만 유쾌한 때를

즐길 정도의 여유와 함께,

사랑한다 싶을 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는 데

주저하면 비겁합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해'라고는 함부로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아'라고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감정고문자들이 제법 많은데,

'한 때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같잖은 동정을 담은 의무감은

사랑을 이미 잃은 상대에 대한

야비한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사랑해, "라는 말에도

진정을 담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의외로 사랑이

진보적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만,

우리의 사랑은 늘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엔 중고가 없으니까요


보수적인 것도 없지 않은데,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고

흔히, 집착이라고 합니다








*중국 명나라의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까지 활약한 문예비평가. 그의 '한 때'는 비가 오면 떠오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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