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어나다
나에게 '제인 에어'는 꿈이었다.
중학생 시절 이 책을 읽은 후 브론테 자매의 '폭풍의 언덕'을 연달아 읽고 문학 감성에 빠져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고 바로 실행에 옮겨 같잖은 소설을 써보았었다.
여중생의 풋사랑 이야기였는데 원고지 분량이 제법 많이 나와서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문학소녀였지 싶다. 청춘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멋진 사랑을 꿈꾸던 문학소녀들 틈에서 잘난 척 읽은 세계 명작 "제인 에어"의 순수한 사랑은 친구들의 청춘 연애소설 속 사랑과 수준이 다른 사랑이라고 여겼었고 그래서 그런 사랑을 하고 그런 소설을 쓰는 꿈을 꾸었었다.
소설 속 사랑은 아니지만 나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 후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제인 에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책을 읽고 가졌던 낭만이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다시금 기대하였으나 30인치 텔레비전 화면이 작아서 그랬는지 영화는 텔레비전 화면만큼이나 답답하고 옹색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아름다운 장면들을 그려내지 못하였다.
하여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완역본 책을 구입해 다시 읽어 보았지만 이미 본 영화의 영상 그 이상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멀어지고 잊힌 '제인 에어'였는데 몇십 년이 지난 이때 보고 싶어 졌다. 엷게 흐려졌던 그래서 어느 날 자연스레 잊힌 어릴 적 소망이었던 소설! 그 소설을 다시금 써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생겼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근원을 찾아서 읽은 후에야 한 줄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펴 들었다.
제인 에어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아가 되고 부자 외삼촌의 손에 맡겨지지만 불행이 연속되어 외삼촌도 죽고 외숙모에 의해 양육된다.
그녀에게 애정이 없는 외숙모와 못된 외사촌들에게 괴롭힘과 멸시를 당하다 10살 때 고아나 의탁할 곳 없는 가난한 여자아이들이 다니는 자선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헬렌이라는 친구와 템플 선생님을 만나 내면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열심히 공부해서 인정도 받아 6년간의 학생 신분 이후에 2년간의 선생 신분으로 나름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18살 때 의지하던 템플 선생님이 결혼으로 학교를 떠나면서 제인 에어도 그곳을 떠나 손필드 저택의 입주가정교사가 된다.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를 처음 만난 언덕(고개)의 기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음을 이번에 알았다.
(멋진 초원의 언덕 위에 잘생긴 말을 타고 멋진 중년의 남자 로체스터와 18살의 순박하지만 당찬 제인 에어가 만나는 순간이 로맨틱했었다. 초록의 작고 부드러운 풀들과 줄 선 키 큰 나무의 그늘과 그 사이에 부는 바람이 있었다: 이게 내 상상)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로체스터는 절뚝거리며 일어나야 했고, 다소 거친 말소리와 거무잡한 피부색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거만한 몸짓! 그것을 목격하고 어떠한 도움이라도 주고자 하는 제인 에어! 어정쩡하게 마주한 두 사람의 상태가 제대로 된 첫 만남의 장면이다.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대화가 참으로 재미있다. 요정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묻는 말들이나 당차게 하는 대꾸들이 재치 있어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으면서 그런 사랑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18살 고아 아가씨와 40살의 부자 중년 남자의 사랑은 나쁘지 않겠다를 넘어 꽤 좋다고 생각되었다. 로체스터에 미친 아내가 있다는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로체스터의 재력에 이끌린 천박한 내 본능이 두 사람의 결합을 묵인해 주고 말았다.
결국 비밀이 만 천하에 공개되고 결혼은 무효가 되었을 땐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인 에어가 새벽에 맨몸으로 손필드 저택을 빠져나오고 4일간 거지처럼 생활을 할 땐 이전의 읽은 기억이 없이 생소하기까지 하여 무슨 일을 당할까 긴장되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장면엔 안타까운 맘으로 정독하였다.
다행히도 거지의 삶은 바로 종료되었다. 무어 하우스의 삼 남매를 통해 숙식을 해결하고 교회에 딸린 학교의 선생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제인 에어 자신은 한 번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존재조차도 외숙모가 죽기 전 보여준 편지를 통해서 알게 된 부자 삼촌이 죽으면서 거액을 상속을 해 줌으로 제인 에어가 부자가 되는 과정을 읽을 때는 갑자기 이 책이 어린이 동화였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사색하고 불의에 굴복하지도 않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신여성상을 그려내는 수준 있는 책이라 여겼는데 순간 부자 삼촌을 통한 거액의 상속이라는 뜨악한 복권은 역시나 여성의 사회적 독립이 허용되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라 어쩔 수 없는 설정인가 싶어 아쉬웠다.
자신을 돌보아준 무어하우스와 삼 남매가 제인 에어와 고종사촌 간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반갑고 기뻤으나 고종사촌 오빠 세인트 존의 선교사 활동을 위해 청혼을 하는 부분에서는 예전 지인이 떠올라 잠깐 웃음이 새기도 하였다.
(지인은 선교사와 결혼을 했다. 선교사와 그럴듯한 연애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깊이 사랑을 한 것도 아닌데 사역이라는 중대한 목표가 두 사람을 결혼시킨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서 도저히 잠자리를 할 수 없더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도하면서 그날 밤을 보냈다는.... 여하튼 두 사람 사이에 형제가 생긴 것을 보니 매일 밤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지 싶다)
세인트 존이 청혼 후 기도로 그녀의 맘을 잡으려던 순간 제인 에어에게 들린"제인, 제인, 제인"의 환청이나 로체스터가 한밤중에 불렀던 "제인 제인 제인!"은 내가 선정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자신의 집은 미친 아내가 저지른 방화로 불타고 그 상황에서 실명하고 한 팔을 절단한 불구가 되어버린 로체스터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밤에, 진심은 그 어떤 환경적 요인과 상관없이 순수한 영혼의 소리가 되어 수백 마일의 고요를 뚫고 제인 에어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고 도저히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품기 어려운 외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체스터를 제인 에어는 처음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로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다니.... (책은 여기서 조금 더 이어진다.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는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10년간 살고 있다. 로체스터의 한쪽 눈이 시력을 찾기 시작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둘은 행복하게 산다로 끝이 난다)
그래서 세상 순진했던 어린 소녀는 그런 사랑이 값진 것이라고, 그런 사랑을 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은 소망을 품었었는데, 세상을 경험하고 나름 고생하는 세월을 지나 중년에 들어선 하숙집 이모가 다시 읽어본 소설 속 사랑 이야기는 그다지 순수하다 할 수도 없고, 잘했다 칭찬할 수도 없고 그냥 동화려니 그건 그저 소설이기에 가능한, 꿈같은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18살 아가씨와 40살의 중년이라는 나이 차이도 심난한데 몸까지 불구가 되어버린 로체스터를 사랑만으로 품는다는 것은 너무 감상적인 처사라고 생각되었다. 세인트 존에게 사랑 없이 사역에 대한 의무만으로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대답한 것처럼 사랑만 있고 현실성 없는 결합도 살면서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해 보라고 참견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나 아마도 시도는 더욱 늦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