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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이모 Nov 29. 2020

하숙집 김장하기 전날

조금 더 넉넉하게

장날이 하루 지난날, 오거리 장터 전봇대 바로 옆에 얼마 안 되는 양의 배추를 쌓아 놓고 할아버지 한분이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탄 내가 다음날 김장하면서 먹을 수육용 고기를 사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만원에 12개."

개미가 귀에 대고 속삭인듯한 소리를 알아들은 것은 자전거가 10여 미터를 지나온 후였다. 그 소리가 내 등덜미를 붙잡았다. 자전거의 방향을 돌려 배추장사 앞으로 갔다.

"저기 사장님, 조금 전 만원에 12개라고 하신 게 맞아요?"

가까이 다가가서 아주 작은 소리로 나를 부르신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처음엔 만원에 8개에 팔았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싸게 파세요?"

"올해 농사를 처음 지었어요. 팔려고 농사지은 게 아니고 식구들 먹으려고 심었지요. 한데 코로나 때문에 자식들이 못 내려와서 버리기는 아깝고 누구라도 나눠 먹자는 생각으로 가져왔는데 운임비가 30만 원이 들었어요. 운임비는 받아가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은 건축학교를 조퇴하고 친정집으로 배추를 뽑으러 간 상황이라

'엄마네 배추는 몇 포기나 될까, 지난번 봤을 때 포기가 덜 찼던데, 한 30포기 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분이

"몇 포기나 필요하세요?"라는 말로 끊어 버렸다.

"그러니까요. 몇 포기가 필요한지 생각을 해봐야 되거든요. 한 30포기 정도 있으면 될 것도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이걸 사도 가져갈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와서요."

"제가 배달해 드리지요."

"운임비 내고 가져오셨다면서요. 어떻게 배달해 주시려고요."

"택시 태워 보내면 될 거 같은데."

"아이고 사장님 그러면 돈이 또 들잖아요. 그나저나 이 배추가 몇 포기나 될까요."

"한 50포기 됩니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저 쌀집이 저희 거래처니까 거기 사장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올게요."


말을 마치고 쌀집을 쳐다봤는데 등받이 자전거가 보였다. 아차, 쌀집 사장님도 차가 아니라 자전거로 쌀을 배달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냥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쌀집으로 가서 "사장님 요기 앞에 택시 기사님 잘 아시나요? 혹시 트렁크에 배추를 실어 달라고 하면 해 줄까요?"

"글세요, 물어봐야 알겠지만 많이야 실어 주겠습니까? 배추 사셨나요. 그냥 그 옆에서 놔두었다가 나중에 실어가도 될걸요. 여기는 사방에 카메라가 있어서 누가 가져가지 못합니다. "

"아~. 그렇게 해야겠어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저분은 현금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전거 타고 나올 땐 핸드폰과 신용카드만 가지고 다닌다. 핸드폰 속 페이 app으로 시장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현금 없이 다녀도 불편하지 않다. 지역 페이가 안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카드를 들고 다니기는 했으나 이 카드는 대출받을 때 이자율 낮추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 돈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혹시 잔금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농협으로 들어가 조회를 했더니 10만 몇천 원이 있다. 만 원짜리로 10만 원 인출하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그 상황을 설명하고 언제쯤 올 수 있냐는 질문을 하며 할아버지 앞으로 갔다.

"배추 안 사셔도 고맙습니다."

"왜요. 살려고 돈도 찾아왔고요. 배추도 여기 놔두시면 남편이 한 시간쯤 뒤에 와서 가져간다고 했어요. 배추 50포기 다 가져 갈게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주시고 싶은 대로 주세요."

"만원에 12포기라고 했고, 처음엔 8포기씩 팔았다고 하셨으니까 5만 원 드리면 될까요? 그런데 배추 안 세보 셔도 돼요?"

"세볼까요."

그래서 전봇대 이쪽에 있던 배추를 전봇대 저쪽으로 그분과 내가 옮기며 세어 보았다. 52개다.

"만 원짜리 6장을 세어 할아버지께 건네 드리며 50개가 넘었으니 6만 원 드리겠습니다."

"그럼 만 원어치 무를 드릴게요."

안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고 무를 쳐다보다 무 몇 개 남아서 집에 못 가시느니 내가 가져오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럼 주시면 감사히 쓸게요라고 했다.

주먹만 한 무를 20개 세서 만원 어치라고 말씀하시곤 몇 개 남은 것은 덤이라고 하신다.

"고맙습니다. 제가 80살입니다. 평생 서울에서 살다가 우리 아내가 아파서 좋은 공기 마시며 살려고 작년에 시골로 이사를 왔어요."

연세가 80이 되셨다는 말씀에 그분을 살펴보았다. 작은 체구에 뽀얀 피부, 서재에서 책을 보고 계시면 잘 어울릴듯한 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사세요."

"**면에서 살아요. 여기 **부속고등학교를 나왔지요. 제가 3회 졸업생입니다."

"와~ 저희 둘째 아들 선배님이시네요. 세상에나 귀하신 분을 뵈었어요."

"어허, 훌륭한 아드님을, 아 그래서 어머니가 이렇게 훌륭하시고."

"아니에요. 저는 훌륭하지 못하고 제 아들도 훌륭한 거는 아니에요. 그나저나 농사 경험도 없으신데 힘드셨겠어요."

"집 옆 밭에다 심어 봤습니다. 이거 배추 가져오느라 모양이 이래서...."

할아버지는 여전히 조용한 말씨로 이야기하시며 당신의 차림이 허름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이셨는지 옷매무새를 고치셨다.

"그나저나 어떻게 가시나요."

"이제 버스 타러 가봐야지요. 이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배추 사 준거 보다 더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들 오면 이야기해 줘야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감사합니다. 좋은 배추 싸게 사고 아들 선배님도 뵙고요. 저도 사장님 뵌 이야기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겠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4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몸이 아픈 아내분이 걱정되었는지 정류장 방향으로 가시는 그분의 발걸음이 바빠 보였다. 그분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우리 하숙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한 시간쯤 지난 뒤 남편은 친정에서 뽑아온 배추를 정리한 후 오거리 시장 전봇대 옆에서 배추를 날아왔다.

"내가 배추를 차를 싣고 있으니까 아주머니 둘이 와서 배추 사겠다고 이거 얼마냐고 묻는데."

"에고, 그 아주머니들 아까 할아버지한테 가서 일찍 사갔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네요."

" 당신 이 배추 몇 포기라고 했어?"

"52포기요."

"세본 거야?"

"네. 둘이서 같이 세봤어요."

"54포기야."

"에고 어째요."

"처갓집에 배추가 남아서 한번 더 다녀와야 하는데 생각보다 배추가 많네."


처음 계획보다 배추가 넉넉해졌다.



*사진은 남편이 친정에 한번 더 간 사이 혼자 배추 작업을 하다가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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