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플라스틱 메뚜기
지난가을, 열매를 떨구는 나무 밑에서 마른 잎을 줍는 그 선생님의 손바닥에 모인 한 움큼의 낙엽은 씨앗이다. 내 눈에 그저 가을 낙엽으로만 보였던 것들이었다. 납작한 나뭇잎 모양과 짙은 갈색을 띤 껍질의 한가운데는 자신을 낙엽처럼 무용하게 위장하고 지키려는 씨앗이 살짝 볼록하게 숨겨져 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내 눈에 고양이나 너구리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자신의 눈에는 식물과 그 씨앗들이 보인다고. 그는 나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산에 고양이뿐만 아니라 너구리와 고라니와 황조롱이가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식물은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동물 덕분에 조금씩 식물에 대한 무지를 벗어던지는 중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단지 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습이 뒤따르는 행위다. 내가 동네 골목을 걸어가는 고양이를 봤다고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의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이 뭘 하려는 것인지, 나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 행동은 고양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런 연결들이 생겨날 때 이해와 추측과 상상 사이를 채우려는 노력들이 발생한다. 지각한다는 것은 조각조각 알게 되는 지식을 통합해 가는 종합적인 사고 능력이다. 도시 생활에 길들여졌던 내 몸은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숲 속의 생태에 대한 지식 조각이 맞춰지고 있다.
지지난 여름 내내 근린공원의 비탈에 나무들이 사라지고 길이 만들어졌다. 길 옆으로 배수로가 만들어지고 그 옆으로 체험장이 만들어졌다. 조각난 나무는 매끄럽게 다듬어져 땅에 박히고, 플라스틱 밧줄은 가로세로 십자로 엮어 늘어뜨리고, 니스 칠한 널빤지로 만든 평상이 놓였다. 일 년 동안 꾸준히 손본 덕에 지금은 ‘유아숲체험장’이라는 노란색 글씨의 팻말이 공원 입구에 높이 매달렸다. 열기가 누그러진 가을에 들어서면서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일군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줄지어 산행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옷은 제각각이었지만 노란 모자만은 하나로 통일되어 개성 있는 아이들의 한 무리라는 인상이 무릇 재미있게 여겨졌다.
고양이 챙기러 정기적으로 방문하다 보니 체험장 운영과 교육을 맡고 있는 분과 말을 섞을 기회가 생겼다. 바로 내가 고양이에 대해, 너구리에 대해, 고라니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식물과 씨앗과 체험장을 찾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그 선생님이다.
“요즘 아이들은 물티슈 세대예요.”
“네?, 물티슈요?”
“엄마들이 늘 물티슈로 닦아주니까 조금이라도 손에 뭐가 묻는 걸 못 견디는 아이들이 많아요. 흙은 당연히 안 만지려 하고요.”
“하!”
“유치원 선생님들조차 곤충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젊은 세대라 곤충이나 벌레에 대한 혐오가 커요. 그러니 아이들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죠.”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이네요. 동물에 대해, 자연환경에 대해 얘기해도 자신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정보가 없으니 현실성도 떨어지겠네요.”
“그렇죠.”
문득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체험장을 찾은 아이들은 체험장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는 줄지어 산행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 산행 길은 내가 재건축지역에서 쫓겨난 고양이들의 급식소를 운영하는 곳과 겹쳤다. 산 중턱에 마련한 넓고 평탄한 부지는 운동장처럼 펼쳐져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공간인 데다 테두리에 작은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마침 내가 그곳에 놓인 급식소 하나를 청소하고 있을 때, 아이들은 구석구석 풀밭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한 아이는 내게 달려와 뭐 하냐고 묻기도 했고, 고양이 밥 줄려고 한다는 말에 고양이 보고 싶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선생님의 재촉에 찾아야 할 뭔가를 찾으러 친구들 사이로 돌아갔다.
저만치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 삶에 아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지 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의 수다스러움이 잔잔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급식소를 청소하는 손은 이젠 생각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절로 움직였고, 덕분에 내 눈과 귀는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로 향했다. 어른에게는 시답지 않은 대화지만 그 대화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가늠하는 과정이니 아주 중요한 시기에 나누는 적절한 대화일 것이라는 나름의 어른스러운 판단을 하며 즐거워할 때였다.
“엄마야!”
세상 태어나 그렇게 큰 곤충은 처음 본 데다 벌러덩 배를 드러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엄마를 찾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메뚜기였다. 메뚜기가 뒤집어져 널브러져 있었는데 살면서 그렇게 큰 메뚜기는 처음이었다. 두려움 앞에서는 몇십 년을 살아도 엄마 찾는 애인가 보다.
이내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안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이 찾고 있었던 것은 바로 본 적 없는 곤충, (장난감) 메뚜기였다. 나는 아이들이 급식소 옆에 던져진 장난감 메뚜기를 찾으러 오려면 내가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정리하고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그 가짜 메뚜기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물티슈 세대’라는 말과 ‘플라스틱 메뚜기’가 겹치자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함축적으로 이해되었다. 플라스틱 메뚜기에는 익숙해도 진짜 메뚜기를 본 적 없고, 놀다가 더러워진 손을 금방 물티슈로 닦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를 만든 것이다.
동네 근린공원조차 체험장을 만들고 교육적인 뭔가가 있는 것처럼 꾸미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찾지 않는데 저 먼 아프리카 초원이 관심의 대상일 턱이 없고, 바다 생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와닿을 리가 있을까. 동물이 죽어간다고 말해도, 자연이 파괴되어 간다고 말해도 자신의 경험 안에 감각한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뭘 지각하고 지식으로 쌓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자꾸만 동물의 위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포르노처럼 자극적일 수밖에 없고, 그 자극적인 것에 감정적 반응만 쌓이는 것 같다.
어린이숲체험 공간 마련할 때만해도 야생동물 머물 곳이 줄어든다고 걱정했는데, 반대로 이렇게라도 안 하면 도대체 다음 세대에게 뭘 남겨줄 수 있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