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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울타리 Jan 21. 2021

단독주택 10년(겨울) - 앞 집 김장



언제나 바쁜 아침시간. 앞집 할아버지가 계셔서 인사를 하고 막 차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이봐, 애기 엄마!(할아버지는 우리를 처음 본 그때처럼 부르신다. ^^;;;)  우리 그 통 좀 빌려줘!"
"네 그래야죠. 언제 드릴까요? 이따 저녁에 가져다 드릴 가요?"
"아무 때나 줘. 아니다, 그때 주면 더 좋지~! 잘 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사람 좋은 미소 지으시며 출근하셨다.

한참 김장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할 때였다. 앞집의 도로에는 그날 하루 전부터 배추가 쌓여 있었다. 보통 배추를 텃밭에서 미리 거둬, 하루에서 이틀 밤 정도 천막으로 덮어 놓으시는데,  한번도 누가 가져가는 이가 없다 했다. "가져가면 말지 뭐.^^" 이 말을 덧붙이시면서...

퇴근 후, 아무리 건망증이 심한 나라도 산처럼 쌓인 배추를 보고 그 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전, 우리 집 데크에 있는 커다란 고무통(어른들이 더 잘 쓰시는 명칭, 다라이)을 들고, 앞집으로 향한다. 그 통은 어른이 들어가서 살짝 발도 뻗을 수 있는 크기이니 그 무게가 상당했다. 그렇게 힘들게 갔건만 대문이 잠겨있었다. 그렇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대문이 낮아 살짝 들어 안쪽에 놔두고 오면 된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앞집 김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앞집의 식구들이 슬슬 모였다. 큰 딸 식구들, 작은 딸 식구들, 그리고 할머니 동생네 등등.  배추를 다듬고 씻어 그 통에 넣어 소금을 뿌린다. 그렇게 통에 넣은 게 끝이 아니다. 마당에 큰 돗자리를 깔아놓고 추운데도 불구하고 파, 갓, 무 등을 다듬으신다. 그것도 엄청 많이!

일이 있어 외출을 해 어스름한 저녁나절에 돌아와 보니 뒷정리를 하고 계신다. 도로 앞에 야채 부스러기를 쓸고, 마당 잔디밭에 깔아 두었던 커다란 돗자리를 씻고, 우리가 드린 통외에도 많은 통 주의를 정리하신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각종 야채를 다듬고 씻고 절이신 거였다.

그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한참 전부터 시작하셨나 보다. 절인 배추를 씻고 계셨는데 분위기가 곧 끝날 분위기다. 언제부터 하셨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늦은 아침 먹고 설거지하다 보니, 마당에 있던 배추들이 많이 줄어있다. 집 안에선 드디어 우리 친정집에서 했던 김치 속 넣기 작업을 하시나 보다.

우리 집 일요일 오후는 식구 모두 청소하는 날이다. 남편은 청소기, 두 아들은 걸레 밀기. 난 기타 등등을 한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왔는데 어제 그 통이 내가 앞집에 놨던 모습처럼 있다. 절인 배추가 다 들어간 모양이다. '곧 끝나겠군!' 하며 그 통을 원래 있던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청소를 끝내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왔더니 그 사이 남편은 약속 있어 나가고, 아들들 밖에 없다. 큰 아들이 앞집 할머니가 주셨다고 식탁을 위를 가리킨다.

김치와 고기가 있었다. 드디어 끝을 내셨나 보다. 친정 김장이 다다음주 여서, 마침 김치가 똑 떨어진 상태인지라,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배고프다며 아이들이 자꾸 먹자고 한다. 고기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 굳이 밥때 맞춰 먹기보다 음식이 따뜻할 때 먹자. ^^ 급히 전기밥통에서 밥을 떠 보내주신 김치와 고기만 놓은 채로 한 보쌈 만들어 입에 넣는다. 아들들의 탄성! 삼시세끼 차려야 하는 나는 '이렇게 저녁이 끝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만 굴뚝같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먹는데 정신없다.
“맛. 있. 다. ^^”

우리 골목에는 대략 열 집이 서로 마주하고 있지만 우리 앞집처럼 A부터 Z까지 김장을 하는 집이 없다. 우리도 친정집에서 김치 속만 넣어 가져온다. 그것도 힘들어하는데, 나중에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면 내가 과연 할까? 조만간 앞집 할머니가 힘에 부치시면 우리 친정처럼 절임배추를 사서 하시다가 결국 딸이 사 먹는 때가 오겠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에 내 마음이 괜히 씁쓸해진다.

벌써 9번째 이 풍경을 본다. 처음 나에게는 무심하게 한 장면 한 장면 별개로 있던 것이 이렇게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되기까지 그만큼 세월의 약이 더해지면서, 우리 집 앞 골목이 나한테 익어가는 모양이다.

우리 아들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한컷 한컷으로 기억될 저 김장 풍경이 나중엔 이야기로 남아 그 아이들한테 전해줬으면 좋겠다.

김장김치와 고기를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꼭 당부했다.
"앞집 할머니 뵈면 꼭 맛있게 먹었다고 말씀드려, 알았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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