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니 저번에 내렸던 눈과는 차원이 다른 함박눈이 세상 모든 것을 커튼처럼 가리고 있었다. 퇴근이 조금이라도 늦는 경우엔 밀리는 차속에서 시간을 더 보낼까 봐, 정각에 부리나케 나왔다.
시야는 가리는데 바닥면은 미끄럽지 않아 무사히 집에 도착했는데 남편 차가 와있다. 조퇴했냐 물으니 눈 온다고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나 뭐라나? 하여간 그 사장님 속이 좋기도 하시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롱패딩으로 갈아입는다. 남편은 어디 가냐고 의아해 묻기만 할 뿐... 눈을 치워야 한다고 얘기하자 뭐하러 치우냐는 남편. 그렇다. 남편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우리 집 앞 도로에 대해선 관심이 원래 없다. 애초에 기대를 안 했던 탓에 화는 덜 낫지만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 했다. "어째 그리 주인 의식이 없냐!" 윽박지르듯 말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오늘 눈이 잘 뭉쳐진다며, 학원 간 아들만 들떠 기다리고 있을 뿐...
이쯤 되면 남편과의 거리두기를 하고 나 홀로 전장에 나간다. 할 사람이 나뿐이니,방도가 없다.
눈이 오는 날이면 마음이 바쁘다. 그나마 치운 흔적이라도 보여야 이웃 주민들 한테 욕을 덜 먹을 테니까. 그나마 오늘은 눈이 오후부터 퇴근까지 온터라 내가 치울 수라도 있지, 지난번처럼 새벽녘에와 아침에 미쳐 손을 쓰지 못하고 출근하는 날이면 아침엔 마음이 무겁고, 퇴근하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때 치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오고 가는 차나 보행자들이 지나간 눈은 거의 치울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오늘은 그나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눈은 쓸고, 그렇게 쌓인 눈은 장비로 밀고,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시 마크가 찍힌 트럭이 지나가는데, 자세히 보니 적은 양이지만 염화칼슘을 뿌려주고 간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10년을 살면서 동네에서 제설차는 처음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이 항상 쌓여 있었으니 큰도로만 하는 줄 알았던 거다. 그래도 내가 거의 정리한 도로 위에 사뿐히 뿌려 준 염화칼슘 믿고 세세한 뒷마무리는 접는다. 남편에게 눈치우라고 잔소리 안 해 그런가? 왠지 상 받은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다. 장장 5일! 아침까지안 나왔던 온수가 나왔다. 안 그래도 그냥저냥 할만하다 했지만 찬물에 손 씻고, 설거지하고, 채소 씻었더니만 뼈마디가 욱신거려 오늘은 하루 종일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었는데, 무심결에 틀은 온수가 멈추지 않은 것을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그간 고생했던 손이 설거지 하면서도 찜질받고 마사지받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름기 먹은 프라이팬이 뜨거운 물로 살짝 지나만 가도 깨끗해지니, 일한 보람도 느껴져 설거지가 즐겁기까지 했다.
그사이 집안은고요했다. 대신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습기 잔뜩 먹은 눈이라서 그런지 눈을 몇 번만 굴려도 눈사람은 쑥쑥 자랐다. 아들들 보다도 더 신난 남편은 말로는 눈이 무거워 힘들다고 하면서도 연신 헤죽거리며 더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아들들은 그 나름의 세계에 빠져 한놈은 유리창과 눈싸움을 하고 , 한놈은 고드름 칼을 발견하고는 무술 연마에 여념이 없다.
몇 년 만에 저렇게 쌓이는 눈이 왔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예전눈이 왔을 때는 아들들의두 이모와 삼촌, 아빠가 온 동네 눈을 퍼 날라 집안에 눈썰매장을 만들어 준 적도 있었다. 그땐 아이들이 어려 엄청 넓었던 마당인데, 이젠 남자 셋과 그 안에 눈사람만 들어서도 꽉 찬다.^^ 저녁, 작은 마당에 오래간만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눈사람 손님이 간 만에 찾아온 덕분이다.
다음 눈이 언제 올지 모르나, 눈 좋아하는 우리 큰아들이 성인 되기 전에 많이 왔으면 좋겠다. 물론 나는 또 홀로 눈을 치우겠지만, 그리고 비록 아빠가 더 신이 날지언정 아들들이 나가 눈을 만지며 노는 모습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