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물질적 배치에 대하여
선물을 주고받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문화 내지는 의례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게 이해가 안 된다고 몇 년을 계속 고민한 건 아마 의무적으로 무언가를 주기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게 내게 너무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평소에 연락을 잘 안 하다가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한 번씩 선물을 주며 연락하는 건 이해가 된다. 그건 연락의 빌미가 되니까. 그러나 매일같이 보는 연인 사이에 왜 선물까지 필요한지 나는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연락 안 하던 친구에게 선물을 즐겨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 선물을 받아 본 사람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러던 중 어쩌다가 나는 경제인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유명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거나, 시니컬하면서도 꽤나 잘 읽히는 문체로 유명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거나, 20세기의 사드 백작으로 더 유명한 조르주 바타유의 <저주받은 몫>처럼 무언가를 주고받는 일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된 것이다.
자, 그럼 대체 연애 관계에서 선물은 무슨 기능을 하는 걸까. 우주적 차원에서의 잉여를 해소함으로써 폭력을 방지한다는 바타유의 논의는 우선 건너뛰자. 선물이 내게 저주 같긴 하지만 그래도 연인에게 주는 선물이 '저주받은 몫'의 해소를 위한 방안이라고 하기는 좀 과하다. 그레이버는 어떤가? 그레이버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했으니 건너뛰자.
그럼 남은 건 마르셀 모스인데, 솔직히 좀 지겹지 않나? 선물 얘기만 나오면 저 고대의 유물이 꼭 불려나온다니. 모스는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묘하게 관념론적인 귀결을 내놓았다. 선물에는 선물을 준 사람의 영혼이 담기고, 그것이 답례를 할 수밖에 없게끔 강제한다는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인 이야기라 연인 사이의 선물을 설명하기에 유독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내게 와닿지는 않는다.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그러니까, 선물은 사물을 매개로 누군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방식인 거다. 누가 경제학과 출신 아니랄까봐, '교환' 모델에 머리가 절여진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교환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어딘지 모르게 계산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경제적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어떤 행위자든 다른 행위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공고히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실험실의 과학자들로부터 출발해서 그런 결론을 내놓았는데, 실험실 바깥에서도 그의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꽤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A와 B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고 하자. 이때 이들은 사람-사람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관계는 사실 사람-(...)-사람으로 그 사이에 수없이 매개된 것들이 있다. 우선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계 사이에 호환이 되는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이 필요하고, 이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갖춘 핸드폰이 필요하고, 핸드폰이 작동하려면 통신망이 필요하며, 통신망을 짓기 위해서는, ...... 이 사례는 이쯤 해두자. 요지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
A와 B가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으로 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고 할 때, 이들은 그냥 타자만 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입말과 문어체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메신저 말투로, 적절히 이모티콘을 섞어 가며, 적절한 타이밍에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한다. 사람은 메신저를 길들이고, 메신저에 길들여지며 우정을 구성한다. 그리고 만약 어느 날 메신저 어플이 모두 먹통이 된다면, 혹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수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우정은, 관계는, 사물들과 사물들이 가능케 하는 행위에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사물 없이는 우정도 없다.
모든 관계는 사물들과 행위들에 의존한다. 마음은 마음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연애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대단히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사물들에 분배되어 있다. 선물은 바로 그런 사물들을 늘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선물을 바라는 건 '상대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관계를 유지하는 당연한 하나의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관계는 사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니까. 관계는 사물을 통해 만들어지니까.
그 자체로 온전하고 견고한 관계는 없다.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도 잘 유지되는 관계에서는 다른 사물들을 잘 활용하고 있을 테다. 다만 모든 관계에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양의 사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관계에 변동을 일으키는 것이겠다.
이 시점에서 나는 다소간 반성하게 된다. 단지 나는 상대보다 적은 사물로도 충분히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혹은 그 정도 마음으로도 충분하거나 버거운 사람이었고), 상대는 그렇지 않았을 뿐이라고. 거기에 특별히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없었던 거라고.
선물과 관련해서 나는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상대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더 많은 곳에 사랑이 분배되어 있어야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건 단순한 차이일 뿐 규범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걸 이 글을 쓰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모든 사랑에는 사랑의 사물이 필요하다. 다만 어떤 사물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지와 같은 미묘한 차이들을 잘 다룰 필요가 있을 뿐. 게으른 건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