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함께 1박 2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다. 산청에서 지내시는 할머니를 뵈러 간다. 할머니는 집에서 언제나 식물을 기르셨지만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산청으로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화분은 대부분 사라졌다. 할머니의 화분에는 자라나는 새싹이 아니라 시들어가는 꽃만 남았다. 봄과 여름 동안 할머니는 산청에서도 거리의 꽃을 꺾어서 집으로 가져 가셨을까.
특히 집 안에서 식물을 기르려면 매일 그것들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주거나 화분의 위치를 옮겨 주고, 때로 영양제를 주어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아닌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다. 집안일을 하면서 식물까지 돌보는 건 생각보다 꽤 많은 품이 든다. 반려동물보다 반려식물을 들이는 것을 사람들은 훨씬 가볍게 생각하고, 비용이나 감정적 강도의 차원에서 그것은 일면 사실이기도 하지만, 일상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친구는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이후 집을 하룻밤도 비운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식물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가을에 처음 식물들을 집에 들인 이후로 우리는 집을 오래 비운 적이 없다. 나와 어머니가 며칠 동안 해외로 나가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집에서 식물들을 돌봤다. 식물들과 함께 산 뒤로 한동안은 나도 매일같이 식물들을 살피고 물을 주었지만, 일정이 불규칙적인 내가 갑자기 며칠 동안 바빠지거나 하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물을 주는 가장 주기적인 돌봄은 아버지가 사실상 전담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매일 식물들을 살피지만, 비정기적인 영양제 주기나 가지치기 정도를 할 뿐이다. 같이 외국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오자는 어머니의 권유를 아버지가 매번 마다하는 이유에는 식물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우리의 단골 가게에서 사장님은 많은 식물을 돌보는 게 ‘할 짓이 못 된다’고 말했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장님만큼 많은 식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알고 있다.
식물을 기른다는 일은 단지 매일매일 무언가를 열심히 신경 쓰고 돌보는 것이 아니다. 돌봄 이전에 그것은 식물이 사람 없이는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는 땅 대신 작은 화분에 식물은 갇힌다. 비단 집 안에 있는 화분만의 문제일까? 거리에서도 아스팔트와 시멘트, 철근과 전선에 막혀 나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비옥한 환경은 줄어들고, 주기적으로 사람이 영양제를 나무에 꽂아줘야 하는 일방적인 의존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람의 책임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사람에 대한 식물의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식물에게서 충분한 흙, 벌레, 빗물, 햇빛을 빼앗고 그만큼을 수돗물과 영양제, 식물등으로 채우려는 시도를 우리는 ‘책임감’ 있는 것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반려’라는 말에서 사람의 책임보다 함께하는 윤리에 방점을 찍는다면, 겨우 1박 2일의 여행이 수반하는 식물 걱정의 배경에 있는 도시적 삶의 폭력 자체를 되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람이 책임 질 일을 늘리지 않는 것이 식물에게도 더 나은 것일 수 있다. 더 큰 책임이 아니라, 져야 할 책임 자체를 줄이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답이 아닌, 과정과 질문으로서의 ‘반려’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