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식물 마케팅에서는 몬스테라 등의 관엽식물이나 작은 다육식물처럼 특정 종들이 유독 강조된다. 환경의 변화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반려식물이라고 바쁜 도시 생활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함일까.
하지만 나에게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지점은 바로 화분이다. 화분에 당연히 있는 흙조차 잘 보이지 않도록 하얗고 매끈한 자갈을 덮어서 파는 ‘플랜테리어’ 상품들은 마치 철저히 위생적으로 통제된 예쁜 식물이야말로 반려식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반려식물’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은 식물의 종, 화분의 디자인과 흙을 덮은 자갈까지도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플랜테리어와 아주 깔끔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홈가드닝’ 상품들은 조금 다르다. 흙이 많은 화분에 쌈 채소나 허브, 방울토마토 등을 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플랜테리어가 그 이름대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인테리어 소품’으로서 식물을 이해한다면, 홈가드닝은 더 많은 실패를 대비하면서도 손에 물과 흙을 적극적으로 묻혀야 하는 과정이다.
플랜테리어가 아닌 홈가드닝으로 식물에 다가갈 때, 우리 앞에는 조금 더 넓은 세계가 열린다. 뿌리파리 몇 마리에 벌벌 떨며 살충제를 뿌려 유지한 매끈하고 깨끗한 창가의 화분 너머로, 거리를 걷다가 군데군데 자리 잡은 지저분하고 벌레가 가득한 화단이 보인다. 이제는 벌레가 조금 기어 나와도 놀랍지 않은 우리 바질 화분이 떠올라서 괜히 친근하기도 하다. 화단의 흙을 만지는 일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화단 앞에서 고개를 들면 가로수가 보인다. 분명 푸른 잎이 무성했는데, 사방으로 뻗었던 가지가 모두 잘려 앙상해진 가로수들. 집에서는 식물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가지의 굵기와 이파리의 색, 화분의 크기와 나의 삶의 방식까지 많은 걸 고려해서 열매나 잎을 딴다. 어떻게든 함께하고자 애쓰는 게 반려 인간의 책임이니까. 하지만 가로수는 사실상 행정적 편의를 최우선으로 두고 가지를 마구잡이로 잘라내기 때문에, 가지치기 과정에서 죽는 나무들까지도 존재한다.
손에 물과 흙을 묻히며 매일 식물들을 들여다보다 보니, 거리의 나무들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는 내가 항상 한 번씩 상태를 살피는 나무가 몇 그루 있다. 어느 날, 그중 한 나무는 모든 가지가 잘려있었고, 다음에는 밑동만 남아있었고, 이제는 밑동마저 다른 풀들로 가려 버렸다. 이런 가지치기가 으레 그렇듯, 간판을 가리기 때문이었을까.
고양이도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의 ‘동네 고양이’처럼, 나는 가로수를 ‘동네 나무’라고 부르고 싶다. 동네에 사는 나무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 책임져야 할 ‘반려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쁘게 다듬어진 식물 말고도, 우리가 누비는 거리의 ‘미관’을 위해 마구잡이로 잘려가며 빛·소음·매연 공해에 시달리는 동네 나무들도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왔다.
이렇게 반려식물의 개념을 확장하면, 우리는 집안을 넘어 거리의 흙과 그곳의 벌레들, 나무들이 마주하는 공해와 폭력적인 가지치기라는 더 넓은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 식물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책임에 연루되어 있을까? 식물을 통해 더 많은 반려의 존재들에 연결되는 일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동네’에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고민 또한 안겨주는 듯하다. ‘반려’란 언제나 책임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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