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시선은 원시적 본능의 장막을 관통합니다. 염치나 체면 같이 사회화된 가면을 벗기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혹은 불현듯 피어 오르는 욕망을 똑바로 응시하고자 하는 의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내죠. 살육과 고통으로 얼룩진 한국의 현대사를 짊어진 그녀의 작품 중 <몽고반점>은 특히 이러한 심미적 탐구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소설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인 ‘나’는 모종의 이유로 창작의 한계에 부딪힌 인물입니다. 만족할 만한 주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그의 아내는 뜬금없이 자신의 동생인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죠. 그 순간 그는 영혜의 몽고반점을 기점으로 삼아 온몸을 꽃으로 물들여 비디오에 담는 작품을 구상해내게 됩니다.
마침내 ‘나’는 영혜에게 ‘몸에 꽃을 그려 작품을 만들 거라는 계획을 얘기하게 되고, 영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가 구상하는 작품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게 됩니다. 벌거벗은 몸에 그려지는 꽃들이 가지를 타며 뻗어나가는 순간, 그와 영혜는 말 한 마디 없이 오로지 몸 위에 체현된 꽃을 매개 삼아 서로의 욕망을 교접하기에 이릅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아마 ‘금기’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실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결혼 제도 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관계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작품을 빙자한 ‘나’와 영혜의 관계는 용인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이보단 오히려 ‘왜 ‘나’는 영혜의 몽고반점에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적합하죠.
의학적으로 몽고반점은 5살 정도가 지나며 서서히 지워지는 유아기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성인의 몸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닌 셈이죠. 그도 영혜의 몽고반점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형언할 수 없는 원시성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성적 욕구, 도덕 관념, 사회적 인과 관계 등 모든 인위성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그는 몽고반점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게 됩니다. 쉽게 말해 살아 숨쉬는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여기게 된 셈이죠. 여기서 누군가는 그의 말을 그릇된 욕망을 예술로 합리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예술적 해방구를 찾은 이의 경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는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를 도식화된 도덕성이란 틀에 가두지 않고, 본질적인 해방과 자기 실현의 차원으로 밀어냅니다. 바로 몽고반점과 꽃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말이죠. 그가 집착하는 몽고반점의 원시성은 때묻지 않은 유아기의 본능, 시간이 흘러가며 지워질 수밖에 없는 찰나의 본능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 그리고 흔적에 대한 감상조차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존재가 성인의 육체, 그것도 평소엔 가려질 수밖에 없는 엉덩이에 남아있다는 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순수함 혹은 어떤 질서나 개념도 개입되지 않은 백지 상태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가령 영혜는 그에게 그림이 있어서 꿈을 꾸지 않는다며 꽃그림이 지워지면 다시 그려달라는 말을 건넵니다. 영혜의 현실을 옥죄는 정신적 고통이 꿈으로 체현된다면, 그걸 막아주는 매개가 바로 몽고반점에서 피워낸 꽃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몽고반점은 이성적인 현실과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순수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그와 영혜의 교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역시 한강 작가가 의도한 바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주류의 질서와 상식에서 탈피하는 존재들이고,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목할 건 그에게 영혜는 예술적 해방구가, 영혜에게 그는 정서적 해방구가 되어준다는 겁니다. 촘촘하게 짜인 현실이란 질서에서 두 사람은 그저 억압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와 영혜가 갈망하는 순수한 해방감은 타인의 시선에선 그저 치기 어리고 무모한 욕망에 지나지 않죠. 그러니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의 자유는 오로지 두 사람의 교감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자유를 얻고 자아를 찾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해답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정서를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어쩌면 한강 작가가 두 사람의 사랑을 형부와 처제의 관계라는 금기에 올려놓은 건,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홀로 맞서기 어려운 거대한 사회적 시선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존재할지 모르는 순수한 욕망이지만 드러내는 순간 죄악이 되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비디오 아트로 선명하게 담아내는 두 사람. 대비되는 두 세계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정서는 무엇일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