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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Jan 05. 2022

달을 보지 마세요

달을 보지 마세요. 달은 자길 쳐다보는 얼굴을 빼앗아 간대요. 빼앗은 얼굴들을 곰보 같은 자기 얼굴에 덕지덕지 붙여요. 그리곤 이내 땅으로 꺼져버리죠. 다음 날 떠오를 땐 어제 뺏은 얼굴들이 보이지 않아요. 아무 것도 없어요. 새로운 얼굴을 빼앗으려는 속셈이죠. 그러니까 앞만 보고 가요. 달은 늘 굶주려 있다는 거 잊지 말고요.

    

남자는 희정에게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본 사이에. 움푹 팬 아스팔트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희정은 마침 도착한 406번 버스에 도망치듯 올라탔다.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계속 땅만 볼 뿐이었다. 희정은 왠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신 나간 넋두리에 휘둘리는 게 웃기면서도 행여나 달을 쳐다볼까봐 조금은 무서웠다.

     

희정은 생각에 잠겼다. 탐욕스러운 달이라. 어쩐지. 달에게 빈 소원은 이뤄진 적이 없었지. 저 남자도 얼굴을 빼앗긴 걸까. 그래서 고개를 들지 않은 걸까. 기이한 추측을 물고 늘어지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죄다 몸뚱어리였다. 창밖엔 덜컹이는 버스에 맞춰 출렁이는 네온사인만 가득했다. 달을 볼 새도 없겠네. 희정은 내심 안심했다.   

  

시계는 밤 11시 58분을 가리켰다. 희정은 고개를 돌렸다. 성에 낀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얼굴. 그 얼굴엔 얼룩덜룩한 때가 얹혀 있었다. 징그럽게 낯설었다. 아니, 낯설게 징그러웠다. 중요한 건 낯설다는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무지 내 얼굴과 친해질 시간이 없다니. 오죽하면 희정은 자기 얼굴을 달한테 뺏겨도 별로 아쉬울 거 같지 않았다.      


띵동. 하차벨 소리인가 했는데 문자 알림이었다. 이번  관리비 자동이체 문자였다. 잔고는 35000. 뭐지. 12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 할머니. 지난주 당뇨 합병증 때문에 약을 추가로 지은 탓이었다. 휑해진 잔고처럼 어느새 버스도 한산해졌다. 창밖으론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슬슬 내릴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신호등 너머로 언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딱 봐도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언덕배기. 저길 올라야 집이 나온다. 언덕을 걸으며 희정은 몇 달 전 할머니가 5일장에서 사온 구두가 떠올랐다. 할머니. 우리 집 언덕에 있잖아. 이거 신으면 발 아파서 힘들어. 그렇게 에둘러 말하며 구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실 뭉툭한 구두 앞코가 촌스러워 싫었을 뿐인데. 그날 희정은 할머니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섭섭한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자기 취향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집 대문의 녹슨 걸쇠는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집안은 냉기로 가득했다. 보일러는 꺼져 있었다. 희정은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외풍이 드는 창문 아래로 김빠진 솜이불을 둘러맨 할머니가 보였다. 인기척이 들렸는지 할머니는 앙상한 손을 허적였다. 나 왔다고 속삭이며 희정은 다시 문을 닫고 신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밑창이 벌어지고 헤진 신발들 사이로 유독 번쩍이는 구두 한 켤레. 희정은 구두를 꺼내 신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니 보름달이 떠 있었다. 둥그스름한 자태가 실로 탐욕스러워보였다. 저 달이 얼른 내 얼굴을 빼앗아가길. 어서 부끄러운 내 민낯을 데려가길. 희정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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