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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May 17. 2022

젊은 날의 나이테

한 뼘 남짓한 창문은 여전히 빗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먹구름에 가린 햇살이 미지근한 탓이었다. 종수는 눅눅한 티셔츠를 손으로 털어냈다. 끈적이는 살결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땀은 금세 차가워졌다. 갓 식은 땀을 닦으며 종수는 어슴푸레한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 양말 한 짝이 어디로 갔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퍼석하게 널브러진 빨래더미를 연신 허적여도, 이틀 전 들른 빨래방에 다시 가봐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온몸을 간지럽히는 답답함에 종수의 이마는 다시 둥근 땀으로 흥건해졌다.


종수는 짝이 맞지 않는 양말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누구도 양말을 한 짝만 팔진 않으니 말이다. 양말은 짝이 있는 게 본질이다. 하나만 사라져도 수명을 다한다. 심지어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럼 나는 애꿎은 양말 하나를 죽인 건가. 진창에 빠진 듯 텁텁한 마음에 종수의 목은 적잖이 뻐근했다.


열어젖힌 속옷 서랍에 남은 양말은 6켤레였다. 양말 하나만 사라졌을 뿐인데 매주 목요일에 하는 빨래에 차질이 생겼다. 계산을 해보니 여유분 없이 6일을 꽉 채우는 상황이 허다했다. 습한 방에서 빨래가 하루만에 마를 리도 없었다. 평소 돈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건조기는 돌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그냥 하나 사고 말 일이었다. 종수는 양말 한 짝에 흐트러진 일상이 이상하게도 버겁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창문엔 사선으로 새겨진 옅은 햇살이 보였다. 그제야 종수는 느티나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며칠 전 주민센터에서 조경작업을 한다더니 그새 베어간 모양이다. 사실 이 느티나무에 대해선 오래도록 말이 많았다. 동네 주민들은 나무가 온종일 해를 가린다느니 나뭇가지에 앉는 새들이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온다느니 열을 냈다. 심지어 나무를 베자는 동의서를 돌려 민원도 불사할 정도였으니 제대로 미운 털이 박혔던 셈이다. 


팔뚝 길이만한 밑기둥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 순간, 탁 트인 창문이 낯설고 아쉽게 느껴졌다. 평소 종수는 느티나무의 연두빛 이파리 틈새로 새어 나오는 햇살 몇 가닥을 좋아했다. 미적지근한 졸음이 찾아오는 대낮에 느티나무의 은은한 햇살은 개운한 단잠을 선사했다. 밤새 불면증에 시달리는 종수에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쨍한 햇살이 창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제 빨래가 좀 잘 마르려나 싶은 기대감으론 달래기 힘든 공허함과 함께. 


종수는 고개를 내렸다. 밑기둥엔 나이테가 새겨져 있었다. 나이테는 1년에 하나씩 생겨난다는데, 세어보니 대략 백살은 족히 넘어보였다. 거리를 수놓은 주택들보다 오래된 역사가 볼멘소리에 잘려나간 셈이다. 종수는 짙게, 옅게 번갈아가며 그려진 동그라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나무는 양말 한 짝이 사라졌다고 별안간 긴박해지는 나의 일상과 완벽한 대척점에 존재하는 무언가였을까. 두툼한 크기만큼이나 넉넉한 세월로 감싸줬기에 그토록 편하고 포근했을까. 나이테는 짙을수록 혹독한 추위를 견딘 거라던데, 이렇게 시리도록 버틴 세월을 잘라보지 않고서야 알 순 없겠구나. 종수는 나무 대신 주차된 차량 몇 대가 놓인 이 거리가 순간 황량하게 느껴졌다.


서른 해 남짓한 세월이 지나도록 이 살덩이 안엔 얼마나 짙은 원들이 테두리를 치고 있을까. 종수는 꼿꼿이 편 손으로 배꼽 주위를 좌우로 갈라보았다. 아마도 평생 알지 못할 무언가는 이 느티나무가 남긴 흔적으로 가늠해봐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잠시, 종수의 머리속은 다시 잃어버린 양말을 떠올렸다. 시계는 벌써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게 문 닫기 전에 가야하는데. 소소한 불안에 잠긴 채 종수는 사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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