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손세이셔널
얼마 전 손흥민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습니다. 제목은 손흥민의 별명이기도 한 손세이셔널.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 손흥민이 있기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을 초대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강원도 소년에서 프리미어리그의 일원이 되기까지를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죠. 순탄한 줄만 알았던 그의 축구 인생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연령대에서 재능이나 센스가 우월했음에도 좌절이나 역경 없이 순탄하게 성공한 건 아니었거든요.
손흥민의 영원한 스승님이자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밝힌 아버지 손웅정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시나 축구선수 출신이었던 그는 얼마나 힘들고 고된 길인지 알기에 처음 손흥민이 축구선수를 희망했을 때 만류했지만, 이내 뜻을 꺾을 수 없자 아들을 직접 지도합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 역시 유소년 시절 기본기 형성이 정말 중요한데요. 수업의 초점은 손흥민의 기본기 형성이었습니다. 본인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함께 훈련을 진행했기에 손흥민도 진도를 곧잘 따라갈 수 있었죠.
동북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얼마 후에 함부르크로 유학을 떠나며 자연스럽게 유럽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갑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말이죠. 1년의 독일 생활을 마친 뒤에 U-17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남긴 손흥민은 다시 독일로 날아갑니다. 함부르크와 정식 유소년 계약을 맺기 위해서였는데요. 어린 나이였으나 인상적인 모습을 펼친 손흥민은 2년 만에 프로 계약까지 맺으며 1군 데뷔 직전까지 순항했습니다.
당시 함부르크에는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공격수 반 니스텔루이가 황혼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박지성과 한솥밥을 먹으며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손흥민에게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죠. 포지션도 비슷했고, 대선배나 다름없는 반 니스텔루이가 먼저 멘토 역할을 자처하며 손흥민에게 도움을 주었거든요. 덕분에 기량과 자신감이 날로 상승한 손흥민은 함부르크에서 성공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손흥민의 프리시즌 활약을 인상 깊게 기억할 텐데요. 함부르크 시절부터 프리시즌이면 무서운 결정력을 자랑하며 본격적인 시즌을 기대케 했죠. 이러한 활약의 배경은 역시나 훈련이었습니다. 구단에서 훈련이 끝난 뒤에도 별도로 슛 연습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진행했죠. 동료였던 동갑내기 무하메드 베시치 역시 참여했다가 도중에 포기할 정도로 높은 강도였습니다.
손흥민의 자기관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요. 냉장고 박스에 축구공 90개를 담아 골대를 맞추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정확도와 힘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자 아버지가 고안한 프로그램이었죠. 매번 같은 훈련만 하는 것은 아니고, 부족한 부분은 특별히 더 보완하며 기량 발전에 주목했습니다. 보통 토요일에 경기가 있어 금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모두 운동을 진행했다고 하는데요. 다른 선수의 갑절로 소화한 셈이죠.
노력이 점차 쌓이면서 빛을 발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쾰른을 상대로 데뷔골을 넣었던 경기였죠. 10대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침착한 몸놀림으로 골을 기록한 손흥민은 단번에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인터뷰에서 그런 식의 골은 많이 상상하고, 연습한 결과였다고 수줍게 밝혔고요. 그러나 어린 나이였던 손흥민이 자칫 자만할 수 있어 그의 아버지였던 손웅정은 노트북을 가져갑니다.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면서 아들이 롱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했죠.
2012-13시즌에는 처음으로 분데스리가에서 두 자릿수 득점까지 성공합니다. 34경기가 치러지는 분데스리가에서 무려 31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며 완벽한 주전으로 자리 잡았죠. 함부르크보다 뛰어난 상위 클럽들이 손흥민에게 구애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준수한 시즌을 보냈으나 아직 어린 나이였고, 주전으로 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팀이 우선이었는데요. 도르트문트와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한 레버쿠젠이 손흥민과 5년 계약에 성공하죠.
함부르크에서 투톱과 측면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었는데 레버쿠젠 이적 이후에는 왼쪽 윙어로 소화하는 경기가 많아졌습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흥민이었지만, 왼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들어 마무리할 때 파괴력이 가장 돋보였거든요. 사각지대에서 공을 잡고 구석으로 정확하게 감아서 차는 일명 손흥민 존이 생길 정도였죠. 보는 사람들까지 절로 시원해지는 통쾌한 골들의 향연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손흥민이 오른발과 왼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대다수가 오른발잡이이듯 손흥민 역시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른발을 주로 사용했었죠.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왼발까지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후천적으로 단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양말을 신어도 왼발, 경기장을 들어설 때도 왼발 먼저, 바지를 입을 때도 왼쪽부터 신었을 정도였죠. 덕분에 지금은 어떤 발이 주발인지 모를 정도로 양발 모두 훌륭한 임팩트를 자랑합니다.
손흥민 존 역시 우연이 아닌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답했습니다. 처음부터 손흥민 존이 생겼거나 그 위치에서 슛을 성공한 건 아니었거든요. 아크 좌우와 페널티 지역 외곽 좌우 사이의 약 10m 부근에서 미친 듯이 훈련했기에 가능한 결과였죠. 여전히 그 위치에 있을 때면 슛에 자신감이 붙는다고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레버쿠젠에서의 2년도 순조로웠습니다. 대부분 경기를 주전으로 소화하며 두 시즌 연속 리그에서 10골 이상을 기록했거든요. 친정팀 함부르크를 상대로 프로 통산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고, 도르트문트만 만나면 펄펄 날았으며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데뷔하는 영광까지 누렸죠. 스타성까지 겸비한 손흥민을 원하는 팀들이 늘어났고, 최종 행선지는 과거 이영표가 뛰었던 프리미어리그의 토트넘이었습니다. 이적료는 무려 3,000만 유로로 당시 역대 아시아 선수 중에서는 최고였으며 토트넘 구단에서도 3위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죠. 등번호도 7번으로 한껏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첫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이내 우리가 알던 손흥민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시즌부터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하며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위협적인 공격수로 평가받았죠. 시즌을 거듭할수록 무결점 선수로 성장하며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2020-21시즌에는 본인의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했고요. 17골로 한국 축구 전설인 차범근과 어깨를 나란히 했죠. 소속팀의 부진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멀었으나 개인 수상을 휩쓸고, 자신의 주가를 끌어올렸습니다.
영국 언론은 손흥민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주목했는데요. 경기를 마치면 바로 집으로 향한다고 밝혔습니다. 술과 파티를 즐길 법도 한데 본인 스스로 철저히 멀리했죠. 손세이셔널 다큐멘터리를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유일한 취미는 게임이라고 했으며 몸에 해로운 모든 것을 피했고, 훈련이 없는 날에도 아버지와 함께 개인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에 휴식도 중요했습니다. 경기 후에는 다리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꾸준히 마사지해주었죠. 충분한 수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나며 충분한 잠을 잤고, 영양 잡힌 식사로 이어졌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손흥민의 아침 식단은 주로 파프리카와 버섯 등이 들어간 오믈렛 및 토마토였는데요. 아침에 다소 과할 수 있는 고기는 피하며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10년 처음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손흥민은 어느덧 10년 넘게 대한민국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A매치 경기가 주춤했었지만, 다시금 재개하며 센추리 클럽 가입도 앞두고 있죠. 유일한 고민거리였던 병역 역시 아시안 게임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획득하며 스스로 해결했고요. 기성용이 은퇴한 이후로는 주장으로 팀원들을 독려하며 이끌고 있습니다. 사교성도 좋아 선배와 후배, 동료를 어우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도 한몫했죠. 기술적으로 뛰어남에도 홀로 돋보이지 않고, 팀이 먼저 빛날 수 있도록 헌신하는 모습까지 참 배울 점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