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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트라우마

내가 서핑이랑 사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1

내겐 가장 힘들었던 순간

by 바다바람

지희는 서핑강사다. 대학 동기인 지희는 줄곧 원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를 이뤄내곤했다. 어느 순간 인스타 스토리를 확인해보니 서핑강사를 하고 있단다. 4학년을 보내야할 시기에 휴학을 했던 나는 어리둥절했다.


지희가 서핑강사를 한다고? 어. 나 서핑하고싶었는데. 인사치레로 몇 번의 Dm을 보냈다.

- 나 서핑하러 갈게

- 응 여름에 놀러와

- 응응 주말에 갈게

그리곤 한번도 가지않았다.


지희가 2년차 강사가 됐을즘, 그 여름정도에 나는 취업을 했고 취업한지 한달만에 난 중범죄 피해자가 됐다. 정확한 죄명은 준강간 치상이다. 꼭 이 이야기를 남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물어본다. 남자친구나 썸남이었냐고, 왜 그러니 조심하지 않았냐고. 가족조차 내게 그런말을 했다. 그런 말들에 상처를 꽤나 받았다. 아직 재판이 진행중이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적어보려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PTSD와 비기질성 불면이 와서 매순간 불안에 시달리고, 스트레스 받으면 공황발작이오고, 약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게 됐다.


평생 정신 질환을 가질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그러니까 너무 무서웠다. 너무나도 나약해져 기댈사람을 찾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겐 이용당하고. 무시당하고, 그냥 그런것들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사건 다음날 그냥 계속 눈물이났다. 사건이 내게 일어나지 않은것만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법률지원을 해주는 상담사(해바라기센터, 성폭력위기센터)에 전화를 했다. 나는 지금 상담이 필요하다고, 제발 오늘 상담받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렇게 그냥 너무 힘든 마음에 집근처 병원으로 뛰어갔다. 당시 나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이렇게 힘드니 그냥 달려가게됐다.

그때 처음 먹어본 진정제는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매 하루하루를 제정신이 아닌채 살았다. 근육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 아무런 의욕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죽음을 생각했다. 또 하루는 하루종일 눈물을 흘렸다. 또 하루는 나 자신을 자책하고, 또 하루는 이겨내려 노력했다.

인턴을 시작하고, 상경당시 같이 살기로 했던 도영이에게 취업하면 3달정도 근무하고 내 집을 구할거야 라며 큰소리를 떵떵쳤는데, 취업한지 한달만에 이렇게 무너져 계속 그곳에 있었다.

하루종일 뭘 먹지도 않고 한달 내내 자면 도영이는 저녁에 꼭 나를 깨웠다. '네가 하루종일 자더라도 내가 온 시간동안은 절대 못자.'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외래에서 근무중인 도영이는 5시에서 6시사이에 퇴근하는데, 퇴근하고 꼭 나를 깨워 내게 밥을 해서 먹였다.


회사는 3개월 정도 회사 병가를 냈다. 회사 과장님이 상황을 이해해주고, 적당한 조취를 취해주셨다. 이때 과장님께 받은 이해와 배려는 평생 잊지 못할거다. 잘릴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내게 꽤나 대우를 잘 해줬던거 같다. 사실 쉽게 결정한 회사도 아니었다. 사실 취업이전 2학년부터 2년정도 공자학원장학생(현국제중국어교사장학생)을 준비했다. 코로나때문에 2년이상 연기돼 흐지부지 됐다. 학교측에서는 입국하라고 매번 말했지만, 북경에서 엄격한 폐쇄정책을 실시해 2년동안 입국할 수 없었다. 온라인 어학연수를 하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건 내 목적과 내 인생의 계획에 어긋났다. 내가 얻고자 하는것들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지금에 와선 장학금기간이 만료돼 재차 신청하는 방안밖에 남지 않았다. 다니는 병원이 있고, 지병이 생긴 나로선 당장 해외에 길게 체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1년 반의 휴학을 마치고 복학해 학교생활을 마쳤다. 다들 중국에 간게 아니었냐고 물어보는 말에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사건 이후에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고작 이런일이 내 삶이 흔드는게 너무나도 싫었다. 난 하고싶은게 너무나도 많고, 당시 다니던 회사의 일도 너무 좋았으니 말이다. 상담을 받으러다니라는 주변인의 권유에 상담을 갔다.

성범죄는 특히 피해자들의 잘못이라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은연중에 내게 편견이 있었나 보다. 사건 이후에도 내 잘못이라 자책하고 채찍질하며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꾸준히 상담을 받다보니 깨달았다. 이 일은 내가 잘못한게 아니구나, 내 죄책감은 사회가 만들어낸것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회사 회식으로 취해있었고, 몇 개월 만에 얼굴을 보기로한 선배가 택시를 타고 자신이 있는 곳에 오래서 갔다. 그리고 제 정신이 아닌 나를 데려가 몹쓸 짓을 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취한 사람을 경찰서에 보내는게 맞다는 건데, 그리고 내 의식은 종종 없었고, 이런 상황자체가 범죄라는걸 인지하게됐다.


이렇게 점차 사회의 시선, 내 내면의 편견들에 벗어나려 해도 기운이 없는것은 해결되지 못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요리부터 시작했다. 날것의 재료들을 넣어 무언가 탄생한다는게,그 탄생한게 꽤 맛있는게 어쩌면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 다음은 요가를 시작했다. 원래는 꾸준히 헬스장에 다녔는데, 가해자와 비슷한 체형만 봐도 그날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몸이 굳었다. 호흡도 가파지고 어지러웠다. 크로스핏, 헬스를 하면서 비슷한 체형의 사람을 보는것 조차 무서워 요가로 도피했다.

요가는 거의 여자밖에 없으니까. 요가를 시작하면서 감정과 정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내 근육 하나하나 숨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나를 알아갔다. 진지하게 요가를 시작해 요가 강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매일매일 꾸준히 요가하는 너무나도 좋았다. 그 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갔으니 말이다. 나는 근력과 유연성이 있어 요가를 곧잘했고, 처음 시작했을때 어느정도 자만이 있었다. 어릴때부터 시작한 합기도, 크로스핏, 웨이트로 쌓아놓은 근력은 어떤 운동을 하던지 내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정말 꾸준히 단련한 요기분들의 동작을 보고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를 생각했다. (요가도 꾸준히해서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나누고 싶다)

이제 내 일과에 요가생겼다. 병원에 가고 상담을 받고, 요가에 가고 수면제를 먹고 수면제를 먹고 자는 삶.


그러다 어느날은 병원에 가기위해 버스를 탔다. 다섯의 쉼표라는 노래가 나왔다.

그게 10월경이었다. 마침 부산에 있던 친구가 너무 힘들면 내려와서 며칠 있다가라고 했다. 힘들다. 라고 했을때 한 3명정도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살라고 말해줬다. 혜인이와 재은이 그리고 도영이가 말이다. 꽤나 헛된삶을 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난 평생 친구들에게 이 정을 나누며 살아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무튼 그때 지희와 재은이에게 연락해 한달간 부산에 내려가겠노라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부산 임랑에서 처음 서핑을 시작하게 됐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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