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하늘이 우중충했다. 햇살이 비집고 들지 못하는 3월의 복도는 마음마저 추웠다. 교실 문을 열자 웃음소리에 파묻힌 복도 끝 응달의 교실에서 맑고 투명한 햇빛 냄새가 났다.
전쟁통 같은 새 학기 첫날의 정규 일과가 끝났다. 한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서면 어느새 컴퓨터 화면 속엔 또 다른 알림이 수북히 쌓인 정신없는 하루가 지났다. 타율인 듯 자율 같은 야간 학습시간에야 겨우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미우나 고우나 일 년 동안 함께 할 아이들이다.
2월 중순에 이미 1반으로 학급이 결정되었다. 늘 그랬듯이 명렬을 받고부터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 이름을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일단 이름부터 익숙해지면 이름과 아이를 연결 지어 외우기가 한결 나았다. 근데 갈수록 그것도 쉽지 않았다. 3학년 쯤되면 긴 머리에 짧은 교복 치마. 풀어헤친 윗옷 단추. 몇 명을 빼놓곤 한결같은 모습이다. 경상도 말로 ‘가가 가’다(그 애가 그 애 같다). 특히 물미역 같은 긴 머리칼을 책상 아래로 늘어뜨리고 자는 아이들을 구별하기란 길치인 내가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도시를 찾아가는 것과 같았다.
아이들의 생김새와 특징을 빨리 파악하려면 개인 면담을 빨리 시작하는 게 좋다. 면담은 주로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이용해 앞번호부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본인의 순서를 묻지 않아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뻔한 수를 쓰지는 않았다.
천 이슬(가명). 첫 번째 면담할 학생을 불렀다. 복도 끝 교실이라 교과교실용 작은 교실이 옆에 붙어 있었다. 웬 재수? 세상에 다 좋을 수도 다 나쁘기도 어렵다. 교무실에서 제일 멀어 다리에 알통 생기겠다고 투덜댈 땐 언제고, 면담할 최적의 장소가 옆에 있어 얼씨구 좋았다. (상담장소로 최적이고, 아이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할 수 있다.)
이슬은 자기 이름이 불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왔다. 나머지 아이들은 뜻밖이라는 듯 수군댔다. 이슬이를 제일 먼저 택한 이유가 있었다. 이슬이 2학년일 때 그 반 수업을 들어갔다. 늘 의기소침하고 발표는커녕 나랑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웃지도 않고 말도 없고 늘 혼자였던 아이. 점심시간이면 다른 반에 있는 딱 저랑 비슷한 2~3명 하고만 어울렸다. 이슬이에겐 우울과 불안의 냄새가 따라다녔다. 이슬의 담임에게 물어봐도 그저 아이가 내성적이라는 말 외엔 들을 수 없었다. 괜한 오지랖인 것 같아 신경 쓰이지만 눈감았던 그 아이. 이제 내 반이 되었으니 모르는 척 할 이유가 없었다.
이슬이에게 너를 걱정했었다고, 표정이 어둡고 우울해 보여 일 년 동안 지켜봤다는 말을 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담임이 아니라 섣불리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는 얘기를 듣던 아이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쏟아졌다. 30여분을 울기만 했다. 나는 말없이 휴지를 내밀며 기다려 주었다. 이슬이 숨을 가다듬고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 애는 밤마다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중 2 때 왕따를 당하고 부산에서 전학해 왔지만 외로움은 더해갔고 점점 사람을 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우울, 불안, 대인 기피증상으로 보였다. 다행히 죽고 싶단 생각이 몹쓸행동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이슬에게 현재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있는지, 상담이나 치료를 받을 생각이 있는지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이 부모님은 상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험난한 세상 살려면 그 정도는 이겨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완고하게 말했다. 게다가 고 3인데 치료며 상담이며 받다가 공부는 언제 하냐고 하니 답답하고 속상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를 살리고 싶거든 꼭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간절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이슬이 부모님은 내 말을 받아들였다.
이슬을 지켜보는 내내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점심시간, 체육시간은 친구를 옆에 붙여 함께 다니도록 했다.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이슬은 심리상담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자습 시간에 복도나 계단 참에 혼자 있게 해 주자 공부에도 집중하여 성적도 향상되었다. 2학기가 되자 표정은 한결 밝아졌고 반 아이들과도 제법 어울렸다.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의 이슬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다.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우리 반 반장이 중요한 학급 회의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 녀석들이 수업하기 싫어 또 무슨 잔꾀를 부리나 싶었다. 정확히 5분 후 박력 넘치게 교실 문을 왈칵 열어젖힌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교실엔 온통 풍선이 달려 있고 책상은 모두 뒤로 밀린 채 아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교직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깜짝 생일 파티였다. 내 생일을 우연히 알게 된 아이들이 늦었지만 다음 날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편지 낭독에 이어 노래를 부르면서 장미꽃 한 송이씩을 들고 나와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옆반에 방해될까 노심초사하면서 파티의 마지막 순서가 됐다. 이슬이가 노래를 부르더니 중세의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우아하게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넸다. 호빵에 난 손톱자국 같은 내 눈이 화등잔만 해졌고 나도 모르게 까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마지막을 자기 차례로 해달란 말에 아이들도 무척 놀랐다고 했다. 볼썽사나운 얼굴로 울다가 웃던 그날. 내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았다.
이슬이의 사람 놀래키게 하는 재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능 이후 3학년들만의 축제가 열린 강당에서였다. 4백 명이 넘게 모인 무대에서 그녀는 기타 연주와 노래를 선보였다. 아이들의 환호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선생님들도 깜짝 놀랐다. 나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토록 뜨거운 열정과 끼를 갖고 있던 아이가 그동안 죽고 싶단 생각을 하며 어찌 살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 왔다.
졸업식 날. 이슬이 부모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선크림을 선물했다. 나는 그 선크림을 차마 쓸 수 없어 유통 기한을 넘길 뻔했다. 이제 20대 후반이 되었을 그녀가 꼬맹이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