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저 오늘 생일이에요.” 아침 조회를 마치고 돌아서는 내게 미미(가명)가 슬며시 다가와 말했다. 평소에 한 알도 생색내며 주는 사탕을 생일 선물이랍시고 다섯 개나 건넸다. 생일이라고 얘기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건네는 선물은 누구에게나 사탕 다섯 개와 안아주기다. 물론 안아주기에서 남학생은 제외다. 아침밥은 먹었는지 묻는 말에 미미는 “네, 뭐~대충”이라고 얼버무렸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면담을 통해 미미의 사정을 대충 파악해 둔 나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 미미는 초등학교 다닐 적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와 오빠랑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현장으로 일 다니는 미미 아빠가 미역국을 끓여 주었을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짠했다.
당시 일반계 고등학교는 밤 열 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이 있던 시기였다. 자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망가면 무서운 보복이 뒤따랐다. 집에 못 가고 벌을 서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3월 한 달은 그녀들의 은밀한 사생활과 신상을 털기 위해 상담을 했다. 또 타율 같은 자율에 길들여질 때까지 자애롭지만은 않은 깐깐한 나의 보살핌도 필요했다.
10시까지 견디려면 든든히 먹어야 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2학년 담임선생님들과 학교 근처 단골 식당을 찾았다. 저녁 메뉴로 생선구이와 나물. 그리고 미역국이 나왔다. 생일이라던 미미의 말이 떠올랐다. 식당 주인분께 미역국 한 그릇 포장 판매가 가능한지 물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미미손에 미역국이 담긴 시커먼 봉지를 잡혀주고서야 하루 종일 체한 것 같은 속이 시원해졌다.
다음 날 미미가 다가와 팔짱을 끼면서
“저 오늘부터 선생님 보디가드예요.”라고 했다. 미미는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다. 키는 170cm 정도에 우람한 여장부 스타일로 덩치로도 말발로도 여학생은 물론 남학생까지 휘어잡았다. 그런 미미가 미역국 한 그릇에 영혼을 팔고 나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가방셔틀이 되었다.
2학년 2학기 학생회 선거를 했다. 부회장에 당선된 그녀는 온 학교를 휘젓고 다녔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 미미를 아이들은 나댄다고 싫어하지 않았다. 적절한 유머와 행동대장 같은 추진력, 성정이 늡늡한 것이 쬐매 부족한 그녀의 학업 능력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았다.
그녀가 운이 좋은 건지 내가 운이 따랐던 건지 미미는 다음 해 3학년이 되어서도 내 반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영혼을 맡겼다.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고, 어떤 때는 능력 있는 첩보원(?)이 돼주었다. 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날. 가정사를 핑계로 모처럼 정시에 퇴근했다. 가족과 함께 외식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모처럼의 이른 퇴근으로 소파에 온몸을 맡긴 채 널브러져 휴식을 즐겼다.
‘딩동’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누구냐며 투덜거린 채 인터폰 화면을 봤다. 화면 속에 꽉 찬 얼굴은 낯이 익었다. 우리 반 학생 미미와 주니였다. 깜짝 놀라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두 녀석은 고깔모자에 케이크를 받쳐 들고 씩 웃고 있었다. 황당인지 당황인지 헷갈리며 일단 아이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방과 후 수업시간에 교과선생님에게 내 생일임을 들었단다. 내 옆자리 K선생 수업이었다. 평소와 달리 정시에 자리를 뜨는 내가 이상했던지 그녀는 무슨 일이냐며 자꾸 캐 물었다. 나의 퇴근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생일임을 살짝 귀띔해 주고 나왔었다. 기밀을 발설한 그녀에게 다음 날 죗값을 톡톡히 묻겠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은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다.
미미와 주니가 온갖 소리를 쏟아 내고 돌아간 후 예상치 못한 후폭풍을 견뎌야 했다. 특히 아들에게. 수업시간에 가끔 남편과 아들을 등장시켰다. 그들에 대한 험담 같은 농담은 아이들의 잠을 깨우는데 특효약이었다. 여고생에게 또래의 아들 이야기는 솔깃한 먹잇감이었다. 들통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자신을 팔아 수업한 엄마에게 아들은 매서운 눈빛 공격을 해댔고 난 몇 푼의 돈으로 입막음을 했다.
미미는 방송작가나 PD가 되고 싶어 했다. 가정형편을 고려해 가까운 도시에 있는 모 대학 국문과로 진학했다. 나는 미미가 졸업한 후에도 2년 동안 같은 학교에 근무했고 그녀는 5월이면 날 찾아왔다. 그동안 받았던 사탕을 갚겠다며 사탕 몇 봉지를 사거나, 반려견 은비의 옷을 사 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시 외곽지역의 학교로 옮겼고 그녀도 학업과 취업 준비로 바빠 내게서 영혼을 완전히 거둬 간 듯했다.
사 년 뒤 여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8월 초 휴가 기간에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약속된 날. 나는 그녀의 집이 있는 동네까지 데리러 갔고 우리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마주 앉은 우리는 또래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인턴으로 모 방송국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앵커의 시간대에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동영상 속엔 9시 뉴스가 끝나는 화면에 자료를 챙겨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경험을 쌓은 후 다시 경력직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녀석은 내가 알던 추진력 짱의 미미 그대로였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수줍게 양산을 건넸다. 우산 겸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다음 만남에선 자기가 밥을 사겠다며 딱 기다리라 했다.
3년이 지났다. 그녀는 여태껏 연락이 없다. 내게 밥 사는 대신 어디에서든 자기 밥값만 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사주는 밥을 먹고 싶긴 하다. 그녀가 밥을 산다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거나 심신이 안정되었다는 뜻일 테니. 가끔 그녀의 연락이 기다려지고 그녀가 건넨 양산을 보며 보고 싶음을 달랜다.
연락다오. 미미! 먹튀는 옳지 않아.
대문사진: 독도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