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의 기술

by 도희

“6년이나 담임을 안 했다고요?” 교무부장은 내 얼굴을 훑어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곤 다시 인사 서류를 뚫어지게 봤다. “아! 연배가 좀......”

그렇다. 어쩌다 보니 동안. 내가 좀 젊어 보인다는 소릴 듣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표정이 밝지 않다. 떨떠름한 것이 땡감 씹은 표정이었다.


학교를 옮겼고 할 수 있다면 담임을 피하고 싶었다. 담임을 맡는 것보단 업무가 많은 게 낫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다정도 병인양 아이들을 귀찮게 하는 편이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교실을 왔다 갔다 하는 오지랖형이다. 그러니 온갖 잔병을 달고 사는 저질체력으로 내게 담임 업무는 체력싸움이기도 했다. 게다가 집에서 옮긴 학교까지 승용차로 40분 거리. 23년을 한결같이 겨우 집과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 일편단심 초보에 지독한 길치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 운전을 하기에는 노안도, 시답잖은 운전실력도 미덥잖았다. 나도 내가 무서웠다.


교장. 교감도, 교무부장도 나이 많은 사람이 왔다고 대놓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늙다리 취급받아 기분은 상했지만 어쩌면 담임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그래서 노인네 취급한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업무 희망서를 제출한 후 살짝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3월 2일. 강당에서 담임 소개가 있었다. 3학년 1반 담임 000. 흐리멍덩한 내 눈에 보일 정도로 아이들의 실망한 눈빛이 역력했다. ‘늙은 아줌마 쌤은 별로~’ 새로 부임한 담임에 대한 호기심이라곤 전혀 없는 싸한 눈빛들이었다.


6년 만에, 그것도 3학년을 맡게 되었다. 학교에서 남녀를 통틀어 제일 나이 많은 담임이었다. 남학생 15명, 여학생 17명의 남녀 합반. 우리 반 남학생 중 몇몇이 일당백이라는 것을 동 학년 교사에게 들었다. 싸움꾼 누구, 골초 누구. 1학년 때부터 유명짜한 아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아이들과의 첫 대면에서 솔직하게 말했다.

6년 동안 담임을 맡지 않아 입시지도에 감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최선을 다할 테니 믿고 따라와 달라고 했다. 웃음기 걷어내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교실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아마 아이들 눈에 비친 담임이 성깔 사나워 보이고 지적질깨나 하게 생긴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의 나는 얼음 상궁 그 자체니까. 하지만 난 웃음이 헤픈 데다 줌마 개그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학생부에서 3학년 생활지도 업무를 맡았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막 자리에 앉는 참에 책상 위 내선전화가 울렸다. 우리 반 남자애들 4명이 점심시간에 학교 밖으로 구름 과자(담배)를 먹으려고 나가다 걸렸단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3일째였다. 똥폼깨나 잡던 녀석들은 2학년 선도부에게 겁박을 하고 결국 교문밖으로 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왔다. 3학년 교무실에 가니 줄줄이 잡혀 온 녀석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3학년 담임 중에는 학생부 남선생이 둘이나 있었다. 꾸중은 이미 귀에 피가 나게 듣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명색이 생활지도 담당인 담임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아이들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녁 급식 시간에 운동장으로 내려와.” 교실로 들여보내고 돌아서며 씩 웃었다. 나 계획 있는 담임이야.


종이 치자 말자 내려온 네 녀석은 신발 끈을 조이며 운동장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이 줄래 줄래 굴비 엮이듯 따라왔다.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하니 눈치는 보면서도 김밥, 라면, 떡볶이, 순대를 골고루 많이도 시켰다. 장정 넷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이들은 꾸중은커녕 실없는 농담과 많이 먹어라는 말만 하니 뭔 상황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미 배 터지게 먹은 욕을 나까지 보탤 필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난 아이들에게 야단은커녕 “앞으로 진짜 못 참겠으면 말해. 한 달에 두 번 외출증을 끊어 줄게”라고 했다. 녀석들은 한 방 맞은 표정이었다. 훅 나가떨어졌다. 골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일 년 동안의 충성 맹세를 받았고 그들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그 후로 녀석들은 아주 가끔, 정말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공손하게 외출증을 받아 갔다. 밀당의 기술이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방귀깨나 뀌는 놈들을 휘어잡아 놓으니 나머지 애들 다루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해는 강제적인 자습이 있던 마지막 해였다. 토요일도 5시까지 자습을 했다. 주 6일 근무인 셈이다. 지도 교사만 근무하면 되지만 딱 한번(왜인지 비밀)을 제외하고 빠지지 않고 나갔다.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간혹 집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만들어 가기도 하고. 핫도그, 빵, 사탕등 주전부리를 준비해 갔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아이들에게 눈 한번 더 맞추는 것 외에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여학생들끼리의 알력, 장기 결석생과 줄다리기, 일 년 내내 지각과 자진 조퇴를 밥 먹듯이 하던 남학생. 외롭고 지친 영혼과의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수십 번의 상담. 그 정도쯤이야 고마운 일 아닌가. 요즘의 교직 생활은 평범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12월이 되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흰머리가 조금 더 늘었을 뿐이다. 오랜만에 하는 입시지도는 프로그램 다루기도 어렵고, 배워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친절하게 도움을 주는 동학년 선생님들이 있어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한두 살도 아니고 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선배를 꼰대로 보지 않고 언니처럼 대하며 친근하게 다가와 준 여 선생님들. 물심양면 아낌없이 도와준 남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내 교직생활 마지막 담임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해 나는 참 따뜻했고 행복했다.


대문사진: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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