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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Sep 20. 2024

개울 건너 남자애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시 한 줄 쓸까 말까 하다가

개천이 범람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날 홍수로 인해 개울 건너 남자애는 가족을 잃었고, 그 애 집 지붕이 통째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은 바로 개천 옆이었지만 집 옆으로 작은 동산이 있어서 온 가족이 무사히 피신 할 수 있었다. 동이 트면서 똥물이 범람하는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 집과 판자와 잡동사니들이 속에서 뒹굴며 쓸려갔다, 어른들이 시체 두 구를 걷어 올리는 것도 보았다. 멀리 개울 건너에서 남자애가 엉엉 울고 있었다. 아이들의 반은 거적으로 덮인 시신 주변으로 몰려갔고, 반은 개울둑에 앉아 떠내려가는 냄비며 소쿠리를 건져내려고 시끌벅적하였다. 엉엉 울던 아이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동산 소나무 뒤에 숨어서 한동안 서성이던 나를.


어느 날 동창회에 그 친구가 나왔다. 친구는 평생 바닥을 전전하며 고독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 후 하늘을 보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술이 한 잔 들어가더니 나 이제 성공했다고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지 않았는지 술 한 잔에 한 가닥씩 쏟아져 나왔지만 그저 독백일 뿐이었다. 그날 술값을 그 친구가 모두 냈다. 떠들썩하게 한 마디씩 추켜세웠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친구의 맞은편에 앉았었다. 내가 누구라고 말을 했을 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징검다리를 건너서 둑으로 올라서면 너희 집이 있었지. 맨드라미가 있던 집. 항상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친구의 성공사례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택시를 타면서 거칠게 손을 흔들던 친구가 여전히 젖은 구두를 신고 있는 것 같았다. 홍수 이후 한 번도 벗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신. 나는 두 번 다시 동창회에 가지 않았다. 


지난밤 비에

담장을 넘어섰던 단감들이 골목을 굴러다니고 있다. 벼들이 모두 누워 있다. 능청스럽게도 유난히 청아한 햇살과 바람이 그 위로 분다. 난간에 새들이 번갈아 찾아와 꼬리 몇 번 흔들고 날아간다. 새는 참 빨리도 일어선다. 참 가볍다. 포르르 펼쳐든 날개를 두어 번 허공에 휘젓고 벌써 사라지고 없다. 앉았던 자리에 흔적마저 털고 갔다.

오전에 잠시 시간이 있어서 붉은 고추 배를 갈라서 널었다. 모으면 한 소쿠리 되는 양이다. 새로 집을 짓고 텃밭에 고추 모종 다섯 개를 심었는데 둘은 병들어 죽고 세 개가 살아 붉은 고추 몇 개를 땄다. 바짝 말린 뒤 가루를 내면 한 주먹도 되지 않을 것 같다. 값도 없이 얻게 된 것이 무거워 새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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