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1번가 주변을 촐랑거리며 통통거리던 시절, 한마디로 머리에 든 것 없이 귀염만 떨던 시절, (그 후로도 내 머릿속은 차본적이 없지만) 아무튼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때였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 뒤로의 기억들은 벚꽃을 타고 투명하게, 가볍게, 온 곳도 간 곳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 있을 때가 많다. 당신께서 다시 가을을 보내준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단지 바람, 바람이 분다. 내 기억 저편으로 불어 가는 바람.
안양 변두리에 있던 조그만 카페 이름은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였다. 그 카페의 전화번호는 세 - 꽃이파리였다. 3- 0282.
카페가 있던 골목에서 여드름쟁이 고딩에게 연애편지를 받았다. 누나로 시작한 편지지에는 마른 꽃잎 서너 개가 붙어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나를 생각하며 긴 밤을 꼬박 지새웠다는 표현은 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본 오빠가 여드름쟁이를"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로 불러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학생이 카페에 들어올 수 없다며, 빵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여드름쟁이와 빵집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여드름쟁이의 여드름이 빨갛게 상기되어 올랐다. 고2라는 배지를 떼어버린 교모는 여드름만큼이나 촌스러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뒤늦게 빵집으로 들어선 오빠는 들어서자마자 내 옆에 앉아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징그럽기 그지없는 윙크와 오늘따라 더 예쁘다는 맨트까지 날렸다. 여드름쟁이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공부나 하라는 훈계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애인으로 둔갑한 오빠의 연기는 그야말로 온몸에 뾰루지가 돋을 것 같은 느낌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연기에 혼신을 다한 오빠의 작전은 성공이어서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그 카페 앞을 지날 때쯤 여드름쟁이는 "누나 사랑해. 안녕 안녕"을 눈물을 뿌리며 고함치다 휙 돌아서 뛰어갔다. 나는 어색했고, 오빠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오천 원을 달라는 뜻이었다. 오빠는 오빠가 아니었다. 웬수바가지였다. 오천 원을 받아 든 오빠는 기분이 좋은지 여드름쟁이가 뛰어간 반대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나는 한참을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그 앞에서 서성였다.
현대다방 디제이를 두고 친구들과 경쟁이 벌어졌었다. 디제이 오빠와 먼저 데이트하는 친구에게 만 원을 주기로 했다. 나의 특기는 지지 않는 것이다. 나의 작전은 치밀했다. 음악을 신청할 때 쓰는 메모지를 특별하고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나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항상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음악을 일정한 메모지에 남겼다. 친구들이 신청한 음악을 디제이가 틀어주면 나는 바로 이어서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디제이>를 신청했다. 어쨌든 내 작정은 성공하였다. 어느 날, 현대다방 디제이 오빠야가 마이크를 잡고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나는 오케이 사인으로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은 나를 꼬나보았으나, 진 것을 인정하고 즉석에서 돈을 걷어 만 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정작 데이트 장소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카페로 나갔을 때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뜬금없이 웬수 같은 오빠가 디제이 오빠야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디제이 오빠야는 웬수바가지 오빠와 동창생이었고, 이 일의 전모를 알고 있던 오빠는 동창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나의 승리는 정정당당한 것이 아니었다. 젠장. 당연히 만 원은 오빠가 뺏어갔다. 분하고 억울했다. 디제이 오빠야는 "야 인마, 난 이미 애인이 있다. 꿈깨라." 하며 일어섰고, 오빠는 메롱을 연발하며 친구와 함께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에서 한 번도 오렌지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카페에는 커다란 메모지 판이 있었는데 손전화가 없던 그 시절, 그곳에 메모지를 꽂아 놓는 것이 연락 수단이었다. 어느 날 그곳에 우연히 들렸다가 메모지판에 백 개의 메모지가 빡빡하게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황당하게도 그 메모지 모두는 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가을 햇살이 눈부셨던 날이었다. 며칠 동안 그 메모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했다고 레지(그 시절엔 그렇게 불렀다)가 투덜거렸다.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냐고 물었을 때 레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눈이 사슴처럼 예뻤던 남자였어요."
여드름쟁이였다.
나는 오늘도 세 개의 꽃잎을 또 마음에 묻는다. 꽃잎에 얹혀 속이 쓰리다. 어제처럼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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