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날
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시력검사를 했는데 안경을 써야 한다고 해서 너무 놀라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 더워서 안경이 흘러내리고 겨울에는 온도차로 안경알이 뿌옇게 되는 불편을 딸이 겪을 생각에 눈물이 났다. 이쁜 얼굴도 가려지고~
학부모가 된다는 것, 얼마나 열심히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는지. 학기 초, 어린이날, 소풍가는 날, 엄마들 모임이 있는 날...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나 과잉으로 욕심내어 딸에게 상처 주고, 실망을 느끼게 하고, 두고두고 미안해했었다.
동화 구연대회에 <백설공주> 하겠다는 것을 <소공녀>로 바꾸어 하게 했더니 중간에 그만두게 되어 첫 대회에서 실패하게 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1학년 2학기 때 반장선거 나가서 당당히 반장이 되어 왔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연세가 많은 분이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여자애가 반장이 되었다고 놀라셨다. 딸이 아들 열 몫 할 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청소하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청소 열심히 잘 하라고 500원씩 나누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이후로 1학년에는 반장을 뽑지 않고 돌아가면서 1일 반장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4학년 때는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걸스카우트에 뽑혔다고 집에 와서 자랑을 했다. 담임선생이 돈이 많이 드니 엄마한테 가서 허락받고 와야 된다고 했다면서 당당히 허락을 요구했다. 남동생이 보이 스카우트를 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고 열심히 장비 사는 곳에 가서 배낭, 옷, 모자, 물통, 당시 50만 원어치 물품을 사갖고 신나게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작은 돈이 아니었지만 '내 딸이 걸스카우트이라니~' 마치 내가 걸스카우트된 것처럼 신났었다.
1~6학년까지 여름방학숙제, 겨울방학과제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견학 기록문, 방학 책은 물론 방학 일기에 사진 찍어서 붙이기로 필름을 몇 통씩 현상하여 작품으로 내고 지리부도를 구해서 세계여행은 못 가고 대신 세계지도를 만들어 큰 전지에 세계 각 나라의 인구, 땅 넓이, 특징, 날씨, 기후를 적어서 오리고 붙였다.
12~3가지를 만들어 과제를 제출하면 최우수상을 받아오곤 했다. 하루에 두 곳을 한 번에 다녀오고 견학 기록문을 만들고 옆집 형제 둘과 같이 농업박물관, 서대문형무소를 다니면서 팸플릿을 가져와서 오리고 붙이고 작품을 제출했다.
나의 청춘? 이었던 40대 초의 아이들의 초등학교 시절, 후회 없이 살아왔던 그때가 그립기보다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