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컬리지 에세이 모임에서 쓴 글
'얼마나 잘 쓰느냐' 대신 나를 돌아보는 매주 토요일 한 시간의 에세이
모임 횟수보다 남아있는 글이 적다. 다 어디 갔지...
4/10 커피를 마주하는 법
자주 가는 카페 바리스타님께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수만 가지의 변수를 배웠다.
커피나무가 어느 나라, 어느 고도에 심어졌는지, 커피 체리를 어떤 식으로 공정해 커피콩을 만드는지, 커피콩을 어떻게 볶는지, 볶은 커피콩을 얼마나 숙성하는지, 커피콩을 어떻게 갈아내는지, 어떤 기계로, 어떤 바리스타에 의해 내려지는지까지 커피는 내 입 속에 들어오기까지 셀 수 없는 시간과 가공을 거쳤다는 이야기였다.
오랜 경력을 지닌 그 바리스타의 가장 큰 고민은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패스트푸드와 스타벅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주변을 서성이고 일분 안에 커피가 나오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커피가 무슨 맛인지, 평소에 어떤 맛의 커피를 좋아하는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를 안타까워했다. 바리스타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통해 바리스타는 손님만을 위한 커피를 만들어주고, 아늑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음미하는 것, 카페에 온 손님이 커피를 위한 온전한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커피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다.
평소 커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나도 커피를 위해 온전한 시간을 내었던 적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갈증이 나서, 잠이 와서,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잠깐 쉬려고, 입가심을 하고 싶어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일을 하거나, 대화를 했고 시고 달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향기에 집중해본 적은 없었다.
그를 만난 이후 카페에 들어가서 카페의 분위기와 바리스타가 내주는 커피가 어떻게 나에게 오게 되었는지, 커피 와바 리스타가 나에게 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약간 고민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향과 맛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려고 카페도 돌아다니고 방치해둔 에스프레소 머신을 위해 원두도 샀다.
한 가지 새로이 느낀 것은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커피가 나에게 온 시간과 내가 이 커피에게 다가 간 시간이 합쳐져 나만의 맛으로 기억된다는 것. 추운 날 설산에 올라가서 마셨던 보온병 속 믹스커피의 기분 좋은 맛을 잊을 수 없다.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흔한 믹스 커피였는데 그날만큼은 꿀맛이었다. 같이 앉아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과 마주 보고 예쁜 카페에서 홀짝홀짝 마신 커피도 분명 맛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커피를 향해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 그 마음이 커피를 향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커피 세계의 어려운 용어들은 도무지 외워지지 않아 아직 내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해낼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마신 커피가 어떤 맛이었는지 왜 맛있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나의 하루도 커피처럼 다채로운 맛으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오늘 마주한 커피에게 인사를 건네어야겠다.
3/30 봄의 점심
길거리에 초록색이 점점 차오르는 봄이 오기 시작하면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춥다는 핑계로 게으러졌던 지난 일상을 반성한다. 지난날의 과오를 되돌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갖고 이루지 못했던 계획이나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시작하려 한다.
별거 아닌, 어쨌든 모든 새로운 시작엔 늘 거대한 기념식이 따르기 마련이다. 음식을 먹고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신중하게 메뉴를 고른다. 그중 맛있는 제철 음식이 선택된다.
작년 초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작은 회사를 만들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새해가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들을 발판 삼아 우리만의 회사에서는 우리의 뜻대로 뭐든지 잘 해나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때 찾아온 봄이 우리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의 봄도 기념될 이벤트가 필요했고 메뉴는 ‘봄 도다리쑥국’이었다. 점심 식사로 먹은 ‘봄 도다리쑥국’은 생선 국치고 꽤 비쌌고 맛도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와 동료들은 봄의 힘찬 시작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즐겁게 먹었다.
봄이 떠나고 계절이 몇 번 바뀌면서 우리는 서로의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얼마 전 헤어짐을 선택했다. 나는 한 해 동안 결국 비슷한 실수들을 했고 딱히 이룬 것도 없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시간 속에 늘 제자리걸음인가 싶다. 그래도 또 여러 시작의 갈림길을 마주하고 있다.
이번 봄에 나는 또 어떤 시작을 하게 될까. 나의 시작을 축하해줄 또 다른 봄의 점심 메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