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당신은 지금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팬인가?
팬심의 깊이는 영화, 팝, 스포츠, 게임을 비롯한 어느 분야에나 적용될 수도 있겠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 본 지 오래되지 않은 나는 이 질문에 지금처럼 일부 아티스트에 대해 깊은 팬심을 보유하기 전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많은 아티스트에 대해 팬이라고 답했다. 많이 좋아하는 경우 찐팬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위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신중하게 나의 팬심에 대해, 내가 그 대상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가늠해 보는 성찰을 거친 후 답하게 된다.
그렇다면 위 질문을 했을 때 답안의 선택지를 3가지 정도로 객관식화 한다면? 음악하는 아티스트에 한정해서 답변을 구성한다면 내 경우 팬이 아니거나, 혹은 팬인데 리스너거나, 찐팬이라고 답을 하곤 한다. 리스너와 찐팬은 팬으로 분류되나 차별성이 생기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크게는 열정에 차이가 있다. 리스너라면 찐팬만큼 팬심이 클 리 없다. 지식의 깊이도 차이가 있고, 그 만큼의 관심도 없고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리스너라면 스키즈의 최애곡을 말하라고 할 때 ‘신메뉴’, ‘MANIAC’ 이런 식으로 유명한 곡 중에 정말 한 곡 정도를 꼽아 말하곤 한다. 그러나 찐팬이라면 단 한 곡만을 말할 수는 없다. ‘타이틀 곡중에는 ‘특’을 가장 좋아하지만 ‘CEREMONY’도 구성이 너무 좋고 ‘MANIAC’도 너무 잘 만든 곡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내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좋아하는지 말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물론 이런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는 건 상대방도 그 아티스트를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에 한정된다). 이런 정도의 애정을 모두에게 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팬의 애정에는 분명하게 깊이가 나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아티스트의 찐팬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아티스트는 리스너일 수도 있다.
리스너였던 사람이 찐팬이 되는 분기점은 무엇일까. 그 출발은 기록할 수 있는 시작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아티스트와의 소통 어플인 ‘버블’의 구독 시작일자로 정의하고, 어떤 사람은 소셜미디어인 ‘X(구 트위터)’ 계정 생성일로 정의하곤 한다. 내 경우 멜론에서 ‘팬 맺기’를 하고 나면 달성할 수 있는 여러 기록에서 내 팬심을 확인하곤 한다. 처음 팬을 맺은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친밀도는 상위 몇 퍼센트이며 몇 도인지, 처음 노래를 들은 날짜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음악감상은 총 누적 몇 회 했는지를 보며 내 마음이 오래 전부터 뜨거웠고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돈을 쓰기 시작하는 것, 즉 앨범을 사고, 공연을 보러 가고, 굿즈를 사는 것이 기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연에 가고 굿즈를 소비하면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거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꽤 오랜 리스너 시절을 거친 ‘찐팬’이다. 처음 찐팬으로 거듭난 경험을 나는 데이식스로 시작해서 초반에는 팬으로서 돈 쓰는 법도 몰랐다.
리스너로만 오래 머물러서 후회되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한 공연이, 그것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 예전에 내가 영업해서 데이식스를 좋아하게 된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가 18년에 콘서트 보러 가자고 했을 때 그쯤엔 관심이 줄어서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팬덤 문화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문화생활 영역 중에 공연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으니까. 이제는 다른 일정이 없다면 공연을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마음의 준비와 금전적 여유를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아티스트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찐팬의 요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리스너 시절 나는 정말로 노래만 열심히 들었다. 심지어 멤버들이 잘생긴 것도 그땐 잘 몰랐고, 노래를 좋아하는 것으로 이미 나는 충분히 팬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팬이라면 나무위키 정독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부분을 저절로 읽고 외우고 있어서 내 자신이 나무위키화 되고, 누군가 궁금해할 때 내 아티스트의 특징을 읊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진단해 본 결과 리스너인지 찐팬인지 파악했을 때, 이제 리스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찐팬의 기준이 너무 과한가 싶기도 하다. 오래 좋아했지만 여전히 리스너일 수도 있고, 아직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찐팬이 될 기회가 없었을 수 있다. 아직 찐팬이 되어 본 적 없다면 수많은 기회가 열려 있으니, 그런 리스너라면 가슴 벅차게 만드는 나의 아티스트를 만나는 데 마음을 더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