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여름, 신용목 시인의 강연을 통해
20년 여름, 동네 책방에서 신용목 시인의 강연을 들었다. 당일 강연 소식을 뒤늦게 알고 밥도 굶고 약속도 취소한 채 한걸음에 달려갔는데 관객은 고작 일곱 명 남짓이었다. 평균 연령은 70세 즈음으로 청년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자연스레 시의 미래란, 문학의 운명이란 하는 것들을 곱씹었다. 마침 주제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시가 필요한가].
최종적으로는 우리에게는 시가 아직도 필요하다는, 반문적 의문의 주제였지만 때론 결론보다 근거가 중요한 법. 예로,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하게 담기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는 이상 문학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시인의 요지였다. 시와 소설의 자리란 바로 그런 곳에 있다고. 적확한 언어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기조가 분명했다. 이어 시인의 물기 많은 눈, 그에 묘하게 조화롭던 다크 블루 셔츠를 번갈아 살피며 거친 언어란 잘못하면 배반의 언어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나는 A를 말하고 있는데 네가 B까진 아니더라도 A-1, 혹은 A-2로 받는다면 참 슬플 일이다.
시인은 아버지와의 불화에 대해서도 나긋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눈이 많이 오던 어린 날 아버지가 용목아, 눈은 어떻게 내리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립니다,라고 했단다. 그런 아들은 없느니 만도 못하다며 그를 내치고 시인의 꿈과, 궁극적으로는 문학의 가치를 억압했던 아버지. 이야기의 에필로그까지 슬프진 아니했지만 문학과, 밥벌이와의 상관성과.. 다시금 문학의 미래에 대한 의문이 돌아왔고 찰나에 잠식하듯 침울해졌다. 그러면 적어도 문학은 행복을 선사하나요,를 묻고 싶었으나 그 질문은 끝끝내 목울대를 넘기지 못했다.
강연은 끝이 났고, 시인에게 목 인사를 한 채 서점을 나오려던 차 친필 사인을 요청하는 분위기가 막 형성되었다. 어쩐지 쑥스러워 서점의 바깥과 안을 괜히 맴돌다, 지나가는 척 사인 글귀를 훔쳐보니 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유의 이유인 마음을 담아, 신용목 드림.
마음은 이유가 되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존재하는 이상 시와 소설의 미래는 영원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보다 명쾌한 답안을 곁눈으로 담았다.
어쩌면 이 겨울의 마지막 눈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눈이 펑펑 내린다. 그리고 어쩌면 이 눈은 가난한 누군가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내리는 눈 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