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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an 21. 2022

문은 이미 열려있어

[엽편소설] 이 도시의 저녁, 나를 꼬신 너의 외로움이 미치게 반가웠어



오랜만이야-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 얼마만이야-


라고 내가 묻기가 무섭게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나도 즉각적이면서도 너무나도 평범하고 잔잔했다.



응, 나는 외로워. 너는 잘 지내?



분명 그녀는 '나는 외로워-' 했다. 

두어 달 만에 연락이 닿았는데 그리고 거의 첫마디가 '나는 외로워-'였다.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는 것인지 오늘 특별히 더 외롭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 적어도 그걸 그녀에게 물어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천연덕스럽게 외롭다고 전해졌을 때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춘 채로 하루 동안 나를 휘감고 있던 무거운 옷을 패대 기치고 싶어졌다. 

사실 그 말은 내가 종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던 말이었으므로 내 마음을 읽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외롭다는데, 외로운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외로움이 일과시간 내내 친친 둘러 감아 숨 쉬기도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막상 내 입으로 외롭다는 것을 시인해 버리면 그대로 외로움 속으로 폭삭 주저앉아버리게 되니까 나는 그것은 어떻든 피해보고 싶었다.


만일 동지가 생긴다면? 외로움을 나눌 또 한 명의 외로운 이가 있어준다면, 그녀 또는 그의 입을 빌어 외로움의 말을 대신할 수 있다면 홀로 깊고 서늘한 수렁으로 폭삭 내려앉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비겁해지자는 것이다.


이 추운 해 밑에, 퇴근 시간에, 하루를 견뎌온 만큼의 무게를 달아놓은 참 빌어먹을 외로움의 옷을 허물 벗듯 벗어던지고 싶었다.


이제는 휴대폰을 붙들고 침묵 중에 그래도 용기 있게 외로움을 고백해온 친구를 더는 기다리게 할 수 없다. 외로움에 응답해야 한다. 나는 얼마쯤 벙 찐 상태로 동그랗게 벌려 둔 입술을 적당히 움직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지금, 거기 어디니? 그리로 갈까?


그러면 나의 그녀는 또 예의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내 집 주방이지요. 지금 캐러멜 만들고 있었어.






나는 그녀가 좋다.


분명 외로우면서도 절대 그 외로움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평범한 기분들 중 한 가지로 받아들이고 넘길 줄 알기 때문에, 감정 앞에 솔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나를 비겁하다고 힐난하지 않아 주어서, 그리고 언제나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 때를 알고 시의적절하게 나를 골라 찾아주기 때문에, 지금껏 그래 왔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고 저런 이유들을 붙이기 이전부터 그녀라는 사람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좋다.


분명 그녀는 이런 식이다. 


캐러멜? 갑자기 웬 캐러멜 바람이야?


했을 때 외로운 사람치고는 평안한 음성으로 또 이렇게 대꾸할 줄 안다.


응- 외로워서 손을 좀 놀리고 있는 중이야. 단내가 생각보다 너무 진동을 해서 조금 덜 외로워지던 참이었는데 몰드에 옮겨 담다가 꽤 많이 흘려서 다시 외로움으로 원점 회귀하려고 하지만.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원점회귀.


나는 절대로 다시  외로움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이렇게 담백하게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이미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서 두 손을 놀려가며 냄비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녹인 캐러멜을 해치우는 소리가 전해졌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매 순간 침착할 수 있는 걸까?


... 그래야 조금 덜 외로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캐러멜을 만들어 보는 거야. 캐러멜이 다 굳고 나면 식혀서 한 조각 입에 무는 거야.
너한테도 한 조각 잘라서 한 입 물려주고 싶어.

... 오고 있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캐러멜 향이 묻어나는 것 같다고 나는 느꼈다.


그것을 느끼느라 나는 답을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고 있니?


그녀가 재차 물었을 때에야 나는 이미 그녀의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에 다다라 있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내려.


아직 기억해? 똑같은 집 거기야. 내려서 길 따라 곧장 걸어 내려오면 돼. 그러다가 편의점이 하나 보일 거야. 거기까지 와서 자신 없음 다시 전화해줘. 거기서 금방이니까.


아니야. 내가 찾아가 보도록 할게. 너는- 너는, 네 캐러멜들을 돌보고 있어야지.


전화 상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조리도구 같은 것들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럼 찾아와 봐. 도착하면 바로 들어오면 돼.
응, 그럴게. 2층 층계에서 왼편 맞지?



응. 문은 열려있어.




이 추운데... 벌써부터 문을 열어놓았다고?


적어도 이런 앞서 감은 그녀에게서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자- 나는 이제 캐러멜이 굳을 동안 커피를 내리고 있을게.
문은... 전화를 걸 때부터 열어뒀으니까. 찬 공기가 이미 들어와 있어서 적응되었어.
커피 냄새가 온 복도에 풍겨나갈 거야. 그 냄새를 따라 찾아오는 편이 더 수월하겠다.


내가 간다고 안 했으면 어쩌려고 현관부터 열어 둔 거였니?


이따 보자.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마지막 말은 그 이전의 무덤덤하고 평온한 음성과는 사뭇 달랐으니까. 

그녀로서는 대단한 시도였다. 

날 단 걸로 꼬드겨서 불러들이고 싶을 만큼, 지금, 이 도시에 나를 그리워하는 이가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정말로 절실한 동지가, 그녀가 있어서 나는 외롭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일 안절부절못하게 외로웠듯이 사실은 그녀도 대단히 숨 가쁘게 외로웠다는 것이, 단내를 풍기며 손을 놀리면서 외로움을 완성해놨다는 것이, 이제 가서 캐러멜 한 조각씩을 나눠 베어 물고서 나는 그녀에게 입이라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저녁 우리가 외로운 게 나는 미치도록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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