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면 ㅁㅁ리 ㅇㅇ골의 어린이 놀이시설 현황으로는 각자의 집과 자연..... 그리고 놀랍게도 놀이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열다섯 가구 남짓한 조그만 마을에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놀이터라고는 했지만 좀 더 정확히는 놀이터 유적지..라고 하는 게 정확할 정도로 '터'가 남아있는 수준이었다. 놀이기구라고는 다 녹이 슬어버린 미끄럼틀 하나와 마찬가지로 녹이 슨 뺑뺑이 하나뿐이었고 울타리마저도 갈색, 놀이터는 온통 갈색이었다. 바닥은 온통 제멋대로 자란 잡초와 흙무더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놀이터에서 자주 놀았다.
뺑뺑이는 잘 돌아갔고, 미끄럼틀은 내가 미끄러져 내려가면 제 기능을 하는 거였다. 다 놀고 나면 손에서 쇠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풀이며 열매를 모아다가 돌로 찧고 요리처럼 만드는 놀이도 우리 공간인 놀이터에서 했고, 어디서 모이자는 약속을 하면 주로 놀이터였다. 덧붙이자면 놀이터는 내 동갑친구 여선이네 집 바로 옆이었다. 그리고 여선이네 집과 놀이터 사이에는 호두나무가 하나 있어서 여선이네 아버지가 잘 익은 호두를 나눠주시곤 했다. 수분기가 그대로 있어 새하얗고 말캉말캉한 호두가 정말 맛있었는데 도시에서는 그런 호두를 만나지 못했다.(궁금하면 '생호두'를 검색해 보시라.)
마을에 어린이는 우리 셋이니 놀이터는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우리만의 공간이니 애착도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어떤 책에서 본 것처럼 놀이터를 그럴듯한 아지트로 꾸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이나 커다란 나무 위의 조그만 별장처럼 말이다.
커다란 이불보나 보자기 같은 것을 활용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시골에선 마구 써버릴 커다란 천 같은 건 잘 없었으므로 아쉽게도 자연에 있는 것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일명 '바나나잎'이라고 부르던 길고 넓적한 잎을 모아다가 미끄럼틀 제일 위 공간을 빙 둘러 아지트를 만들기로 했다. 그 잎은 산아래로 가면 흔하게 있었는데 물론 진짜 바나나 나무는 아니었다. 그것이 무슨 나뭇잎인지는 우리 중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저 아지트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넓고 질긴 이파리는 어떤 걸까 심히 고민했을 뿐이다.
바나나잎을 모아 주변으로부터 가려질 수 있도록 엮는 것으로 우리의 아지트 계획이 세워졌으니 이제 실행을 할 때였다. 우리 셋 중에서 가장 리더 역할을 한 것은 나였다. 가장 키도, 몸집도 컸고 성격도 외향적이며 활동을 제안하고 주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여선이는 작은 체구에 깡마른 말괄량이였다. 까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난기가 많았다. 그리고 내 동생 혜지는 아주 얌전하고 숫기 없는 아이였다. 조용하지만 제법 고집은 있었다.
여선이와 내 동생 혜지에게는 바나나잎을 모아 오도록 시키고 나는 모은 바나나잎을 미끄럼틀 위 가장자리에 죽 엮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여선이의 작은 체구와 혜지의 조막만 한 손으로도 금세 바나나잎이 가득 모였다. 나는 바나나잎들을 교차시켜서 미끄럼틀 창살틀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 갈라져 버린 잎이나 못 쓸만한 잎은 미끄럼틀 아래 바닥에 쓰레기존을 정해 그쪽으로 휙 던졌다. 역할을 분담하고 폐자재 분리까지 하면서 아지트를 만드니 책 속의 모험가들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명의 충실한 탐험가를 이끄는 탐험대장이 된 듯했다.
그날은 종일 우리 주변엔 바나나잎뿐이었다. 하지만 바나나잎만 가지고 면을 만들려다 보니 계속 풀어지고 갈라지기 십상이었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까지도 상상했던 것의 반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린 어린이들이었으므로 해가 지면 얼른 집에 들어가야 했다. 내일을 기약하며 진이 다 빠진 탐험가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자 달려간 놀이터에서 본 아지트는 어제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마저 풀어지고 흐트러져 몇 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며, 그냥 커다란 나뭇잎을 놀이터에 한가득 던져놓은 꼴이었다.
우리만의 요새를 가질 꿈에 부풀어있던 것도 잠시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시들시들해진 나뭇잎만큼이나 김이 무지하게 빠져버린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일은 금세 잊어버렸다. 무슨 일이든 오래 마음에 묵혀두는 법이 없었다. 아지트가 완성되지 못한 건 아쉽게 됐지만 우린 계속 놀아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놀이를 하러 어디론가 달려갔다. 우리에겐 할 놀이가 아직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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