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에게는 그야말로 앙숙인 할머니가 있었다. 그 사실은 나보다 늘 3살이 어렸던 내 동생도 알았을 거다.
우리 집에서 쭉 일자로 직진해서 왼쪽으로 꺾으면 있는 두 번째 집 할머니였다. 마을 할머니들 중에 가장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할머니였는데 그래서인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워낙 조그마한 마을이라 외출을 한다고 하면 높은 확률로 그 할머니를 마주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밖에 쏘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매일같이 그 할머니와 마주쳤다.
그래도 나는 인사를 꼬박꼬박 드렸다. 왜냐하면 그 작은 시골마을에서 어른을 마주치고도 인사를 안 드렸다가는 바로 소문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골의 어르신들은 예의를 중요시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역시 우리 자매에게 첫째도 예의 둘째도 예의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특히 할머니가 예의를 강조했던 건 동네 사람들에게 흉잡히기를 극도로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구네 손녀가 만나도 인사도 없이 쌩 지나가더라’하는 이런 뒷말 말이다.
마을엔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도 많았지만 뭐 하나라도 꼬투리 잡아 흉보는 게 취미인 어른도 꼭 있었다. 그런 어른들은 늘 얼굴부터 심술보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네에 세명뿐인 예쁨 받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그런 어른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인사드렸다. 그런 어른들도 나에게는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끝내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는 않더라도 나쁠 건 없었다. 다만 할머니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엿듣다 보니 심술보가 가득한 어른들은 볼에 남의 욕을 가득 담고 뱉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거구나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할머니는 언제든 그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분노가 차오르셨기 때문에 나는 그 할머니에게는 더욱 인사를 꼬박꼬박 열심히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할머니를 통해 손녀 욕이 들려왔다가는.. 싸움은 기본이요 나까지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또 나는 할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할머니 기분을 안 좋게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사실 난 우리 할머니와 그 할머니가 왜 앙숙인지는 정작 몰랐다. 호기심 많았던 내가 할머니한테 한 번은 물어봤을 텐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난 어른들이 왜 저렇게 서로 헐뜯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넘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일지라도 말이다. 기억나는 건 할머니가 우연히라도 그 할머니를 저 멀리서 마주친 날엔 저 X 눈 부라리는 것 좀 보라며 귀에 꽂히는 멘트들을 줄기차게 이어가셨던 것뿐이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의 눈빛도 만만치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마을의 세명뿐인 어린이로서, 특히 공부를 잘하고 예의가 발라 가장 예쁨 받던 어린이로서 그저 뛰놀고 인사드리고 쏘다니고 인사드렸다. 어른들이 밉지도 않았고 표정이 무서운 어른들도 인사드리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니 나도 아무도 밉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나도 어른이 되고 보니 알았다. 아이의 순수함만큼은 어른들이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조금도 미움이 없는 눈으로 만나서 반갑다는 듯이 밝게 인사를 건네고는 온 동네가 재밌는 냥 뛰노는 아이들이 그 마을에선 윤활유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