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서 큰 도로를 건너면 슈퍼가 하나 있었다. 슈퍼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구색만 갖춰놓은 조그만 가게이자 슈퍼주인이 거주하는 집이기도 했다. 문을 열면 바로 안방에 누워 있는 아저씨도 볼 수 있었다. 슈퍼문을 열고 들어가면 소리를 들은 슈퍼아저씨가 안방문을 열고 천천히 나왔다.
그러다가 중간에 슈퍼가 사라져 버렸는데, 도로개발 때문에 슈퍼를 철거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슈퍼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매일 버스를 타고 유치원이나 학교에 갔으니 면에 가서 간식을 사 올 수 있었고 방학에도 한 번씩 할머니를 따라 장을 보러 가면 되었다. 그리고 슈퍼에서 먼지가 가득 쌓인 물건들을 보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발견한 적도 있어서 라면이나 과자 정도가 아니면 식료품을 사러 웬만하면 슈퍼에 잘 가지 않았다.
다만 슈퍼가 사라진다는 말을 할머니께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슈퍼 아주머니였다. 슈퍼아주머니는 본래 우리 마을에 함께 살던 사람이 아니었다. 늘 혼자 계시던 슈퍼아저씨 옆에 언젠가부터 함께 있었다. 마을에 사람이 30명 남짓이니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내가 슈퍼에 갈 때마다 항상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처럼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어디 가니 하는 말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고 예쁘다, 귀엽다 하는 칭찬이나 관심 있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밝게 웃으셨다. 쌍꺼풀 있는 큰 눈과 봉긋 솟은 동그란 광대가 웃음을 더 화사하게 만들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가야 해서 버스를 타야 했고 차표를 사러 슈퍼에 자주 들렀다. 때마다 달랐지만 한 번에 여러 장을, 때때로는 몇십 장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아주머니가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차표 몇 장 주세요’하고 돈을 드리면 아주머니는 계산을 하는 데에 아주 오래 걸렸다. 계산기를 쓰기도 했지만 매한가지였다. 나는 곱셈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가격을 알았다. 그래도 아주머니의 계산을 기다렸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정답을 말한들 그것은 그것이고 아주머니는 계산을 직접 하실 터였다.
그리고 계산이 끝나 잔돈을 거슬러주시면 두 번에 한 번꼴로 너무 많거나 너무 적었다. 나는 정말로 돈을 돌려드리거나 더 달라고 말씀드리기 전에 다시 한번 계산을 해보았고 내 계산이 맞으면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늘 그랬듯 생글생글 웃으시며 그래? 하고는 또 계산을 해보시고는 다시 돈을 거슬러주셨다. 그래도 두 번째에는 늘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너무 착하고 바보 같다는 것과 돈을 다룬다는 것이 어린 내 마음에 불안을 주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계산이 틀리는 걸 슈퍼아저씨는 아실까?
아주머니가 이렇게 계속 엄청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다른 마을 사람들이 슈퍼에 오면 아주머니가 바보 같은 사람이란 걸 금세 눈치채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거스름돈이 많아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슈퍼아주머니가 영 이상한 것 같다고 흉을 볼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꼭 마을에 이상한 사람만 있었던 것 같지만 마을에서 이런 인상을 주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을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슈퍼 아주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밝게 웃어주셨다. 슈퍼아주머니는 밝아도 나를 근심에 들게 하는 유일한 분이었다. 우리 마을에 내려오는 것도 본 적이 없고 근처마을도 하루가 멀다 하고 쏘다니는 내가 슈퍼 안 말고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를 통해서도 아주머니에 대해 많이 듣지 못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건 어쨌든 나를 안심하게 했다.
그러다 아주머니가 오고서 오래지 않은 어느 날 슈퍼가 사라진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그럼 슈퍼 아저씨랑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냐고 여쭤봤더니 좀 떨어진 더 큰 동네로 간다고 했다. 머리에는 오래 본 아저씨보다 얼마 안 본 아주머니가 먼저 떠올랐다. 정답게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니 그리 정이 든 건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을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늘 가지고 있던 아주머니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