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린이 셋 중 가장 씩씩하고 모든 어른들에게 인사도 잘 드렸던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진돗개 할아버지였다. 진돗개 할아버지는 늘 진돗개 한 마리와 함께 붙어 다녀 이런 별명이 붙었는데 나만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말을 해도 ‘진돗개 할아버지’는 ‘진돗개 할아버지’로 통했다.
진돗개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은 전혀 아니었다. (제일 무서운 건 우리 할아버지였다...) 오히려 진돗개 할아버지는 우리 자매에게 잘해주셨다. 그렇게 느꼈던 계기는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동생이 유치원에 다니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하교 후 집에 갈 버스를 함께 기다리고 있으면 가끔 진돗개 할아버지를 만났다. 진돗개 할아버지도 볼일을 보러 ㅇㅇ면에 나오시곤 했던 것이다. 우리 마을 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대 없어서 돌아가려면 보통 이번 버스나 다음 버스를 꼭 타야 했다. 그래서 면에 나가는 버스나 장날 버스에서 마을 주민을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진돗개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연세가 많으시기도 했지만 원체 말이 없으신 분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도 말씀 나누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진돗개와 산책을 다니실 때에도 할아버지를 마주치면 나는 얼른 인사를 드렸지만 약간의 끄덕임 말고는 말을 건네신 적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몇십 분을 할아버지와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있노라면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에서 할아버지와 또 마주친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돈을 쥐어주시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놀랐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배운 바로는 호의는 일단 한사코 사양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냉큼 받으면 핀잔을 주셨기에 우리는 그것이 몸에 배어있었다. 우리가 손을 내젓자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돈을 건네시는 제스처를 취하셨고 그건 받아도 되는, 받아야 하는 호의였다. 더군다나 우린 아이스크림은 없어서 못 먹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감사합니다! 하고 돈을 건네받았다.
슈퍼 바로 앞에 의자 몇 개를 놓은 것이 버스정류장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뒤돌아 슈퍼 냉동고를 열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할아버지께 여쭤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안 드신다고 하셔서 우리는 아이스크림 두 개만 들고 가 값을 치르고 잔돈은 할아버지께 드리며 ‘잘 먹겠습니다~’했다. 아이스크림은 달고 맛있었다.
나는 여태껏 진돗개 할아버지가 우리에겐 영 관심이 없으신 걸로만 생각했다. 항상 데리시고 다니는 진돗개가 할아버지의 유일한 애정의 대상이라 다른 사람에겐 그저 무관심하신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소리 없는 친절이 그동안 우리의 인사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의미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몽글해졌다. 우리를 예뻐해 주고 챙겨주시는 분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진돗개할아버지의 호의는 더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후로도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을 몇 번 더 사주셨다. 나는 이제 이전만큼 진돗개할아버지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도 진돗개할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는 얘기를 꼭 전달드리곤 했다. 그러면 우리 마을의 은근한 인싸인 우리 할머니가 진돗개 할아버지가 비록 무표정하고 말이 없으셔도 좋은 분이라는 걸 마을 사람들에게 전할지도 몰랐다.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를 품은 채 여름은 지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여선이와 전화로 우연히 진돗개 할아버지 얘기를 나누다 나는 다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 ‘어렸을 때 우리 학교 끝나고 버스 기다리면 진돗개 할아버지가 아이스크림 사주셨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되게 뭉클하다 그치’
여선 - ‘?????? 뭔 소리야?? 그 할아버지 맨날 무섭게 커다란 개 데리고 다닌다고 울 할머니가 싫어해서 겁나 사이 안 좋았는디? 나한텐 아이스크림 사준 적 한 번도 없어!!’
그렇다. 진돗개 할아버지는 여선이네와는 하필 바로 옆집이었고 여선이네 할머니는 큰 개를 무서워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영 사이가 좋기 힘들었다... 는 얘기를 난 세월이 흐른 뒤 알게 되었고 작은 마을 안에서도 동상이몽이었던 것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선이는 아빠차를 타고 등하교를 해서 버스정류장에서 진돗개할아버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도 한두 번쯤 할아버지가 사주시는 간식을 얻어먹은 적이 있겠거니 지레 짐작했었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었던 것을 알게 되자 감성 가득했던 추억이 조금 다채롭게 변모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 살았어도 각자 경험이 이렇게나 다 다르구나.. 하며 말이다. 비록 여선이는 진돗개 할아버지의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돗개 할아버지의 아이스크림은 따뜻한 호의이자 소중한 추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