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 기대어 : 15. 정리

Every Thursday, a new word

by Hee
정리 整理
1.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2.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함.

3.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지 아니하고 끝냄.

4. 은행과의 거래 내역을 통장에 기록으로 나타냄.


불안을 다루는 나만의 언어가 있다.


다리 떨기, 손톱 물어뜯기, 이유 없이 짜증내기, 잠자기, 욕하기 이들의 공통점은?


불안할 때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행동이다. 사람은 이를 잠재우기 위한 다양한 무언가를 한다. 노래를 부르던 술을 마시던 무의식이 만든 방어기제가 발동되어 행동으로 표출된다.


나만의 언어는 '정리'다.


몇 년 전, 밤을 꼬박 새운 날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눈을 감고 노력해 봐도 잠을 잘 수 없었고, 책을 읽으려 해도 글자가 튕겨져 나갔고, 노래를 들어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를 진정시키지 못하는 밤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긴 밤과 새벽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정리 덕분이었다. 당시엔 너무나 아득했던 일분일초를 그냥 채워낸 행동이라 치부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내 불안을 잠재우는 나만의 방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나는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을 정리했다. 시작점과 마지막점을 정하고 불필요한 것을 분류하고 선을 맞추며 그렇게 방을 깔끔하게 만들었다. 정돈된 방처럼 내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결국 잠은 들지 못했다. 그 날 이후, 며칠은 몸과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추억이지만 그때는 우르르 쾅쾅 머릿속에 내리치는 천둥번개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내 불안에 기반한 행동을 보며 정리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거슬리기 시작할때나 눈에 밟히지 바쁘거나 다른 것에 집중할 때는 블러처리가 되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때 보이는 혼란함이 선명도를 높이면 그 때 정리를 시작한다.


내 언어가 정리라고 하니 우리 집도 번쩍번쩍 윤이 나고 냉장고엔 음료가 줄 맞춰 놓여 있을 것 같지만 맘먹었을 때야 하지 피곤하거나 귀찮으면 내버려 두기도 잘해서 자주 깔끔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 되곤 한다. 한 번씩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특히 우리 집 옷방은 그야말로 (엄마표현을 빌리자면 귀신 나오겠다? 거지소굴?) 암튼 말도 못 했는데 최근 이 드레스룸을 왈칵 뒤집어 어느 정도 볼품은 갖춰졌다.


아무튼, 내 인생에서 의도치 않게 날을 샌 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데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고 그날 내가 했던 게 정리였고 그게 내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은 이런 나를 알아 머리가 복잡하거나 심란한 날엔 하고 싶은 구역을 정해 정리를 시작한다.


과거의 나는 불안을 다루지 못해 애썼지만, 이제는 그 곁에 머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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