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Thursday, a new word
친구 親舊
1.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
2.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가깝게 이르는 말
3. 어른이 나이가 어린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
단어마다 내가 가지는 정의는 때때로 모양이 바뀐다.
성인이 되기 전 ‘친구’라는 단어는 나이, 학교, 반이 같은 사람을 의미했다. 미성숙함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24시간은 어느 순간 나를 설명하는 타이틀에 '성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주어진 역할이 바뀌어 감에 따라 친구에 대한 정의도 조금씩 생김새가 달라졌다.
지금 나에게 ‘친구’란,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다.
스쳐가는 인연이 쌓일수록 눈에 보이는 글자보다 마음의 결이 중요해졌고 그러면서 생긴 좋은 점은 그 사람 자체를 더 관심 있게 보게 됐다는 것이다. 소속, 직함 같은 간단한 표현장치는 나를 설명할 어휘력 확장의 필요성을 없앤다. 단어 하나면 그뿐이니깐.
하지만 이러한 장치가 배제될 경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어와 문장을 여러 갈래로 풀어내 이해시켜야 한다. 상대방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나는 대화가 즐거운 사람은 누구나 친구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유치원생이든 엄마아빠 나이를 훌쩍 넘긴 분이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배울 점이 있거나 재미있거나 내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좋은 영향을 준다면 누구든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나에게 타이틀을 통한 친구의 정의가 명확했을 때 한 사건이 있었다.
20대의 중간을 통과하던 한 시점, 친구들에게 끊어진 매듭을 돌려받은 적이 있다. 지금이야 그러려니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이었다. 어떻게든 되돌려보려 고군분투했지만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만능키 같은 건 없었다. 관계라는게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가 될 수 있다는 걸 날 선 차가움으로 배웠다. 이 서늘함을 알기에 관계에 최대한 온기를 담는다. 이 온기를 식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냉담함을 대처하는 건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다. 그때 나를 지킨 답은 합리화였다.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떠난다. 가는 인연이 있으면 오는 인연도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나를 달랬다. 정말 신기하게도 가는 인연이 있으니 오는 인연도 생겼다.
이 시기에 나를 포함한 4명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연결점이 만들어졌다. 이 친구들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고 그 안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이 친구들에게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그저 곁에 와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이었다.
처음의 사건으로 내가 합리화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상처는 상처고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렸다. 이후 나는 편하고 익숙한 사람들만 만났고 갈등상황은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 침묵했다. 새롭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으니 상대방이 가진 관심의 물음표는 마침표로 도장을 찍는 일이 빈번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알았다. 생각보다 마음 깊은 곳에 이 일이 상처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꽁꽁 감싸둔 마음을 풀어내니 상처가 아물었다. 지금은 훨씬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깨어진 관계는 유리와 같아 수많은 파편들을 찾아내 이어 붙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거의'라는 말을 넣은 이유는 깨어진 조각을 맞춰내 다시 이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 특별함은 말 그대로 손에 꼽는 희귀함이다.
인생도 그렇지만 사람사이의 관계도 내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둘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