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엄마한테 빌린 돈 갚아야 하는데 비트코인이 떨어지고 있어"
"너 그래도 한참 수익권이잖아"
"비코 2억 되면 팔려고 했는데... 아 머리 아프네"
D는 오래전부터 비트코인에 투자해 왔다. 말로는 소액이라고 하는데 코인에 자금이 묶여 아파트 계약금을 엄마한테 빌렸다고 하는 걸 보니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정도의 금액을 운용하는 것 같았다. D는 수익이 나면 어디에다 말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스타일이라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암호화폐 시세를 브리핑 받들 수 있었다. 올 가을만 해도 8천만 원 하던 비트코인은 트럼프가 당선되자 금세 1억 5천을 찍고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다 요 며칠 양자컴퓨터 뉴스로 다소 주춤하는 모양새이다. 그래봤자 1억 4천 얼마. 남의 돈이라 그런지 고점에 산 것도 아니고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내심 호들갑이다 싶다.
비트코인 천만 원 떨어진 거야 별거 아니라는 배포를 가진 나는, 역설적으로 코인 투자는 일찌감치 접은 인사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각보다 비싼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고 계약금이 부족해 영끌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택 매수에 있어 D와 나는 마라톤의 페이스 메이트 같은 사이이다). 비록 당시 내 코인 계좌는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지만 일괄 매도 처분하는데 더 이상의 명분은 필요하지 않았다. 점지해 주신 아파트를 잡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이처럼 나는 운명을 믿진 않지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고 반항 없는 삶을 살아왔다. 안된다고 하면 포기하고 뭐든 안정지원했으며 돈이 필요하면 적금을 깨고 주식을 팔았다. 비가 오면 헬스장을 빠졌고 감기 기운이 있으면 PT를 미뤘으며 별다른 약속도 없고 가족과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수영장에 가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D는 조금 달랐다. D가 계약금이 필요했던 건 봄이었다. 충분한 수익을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D는 어머니께 자금을 융통하였다. 우리는 둘 다 재테크에 눈이 벌겋지만 K-장녀로서 은퇴한 부모님께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말 최후의 보루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D의 결정은 꽤나 대단하며 억척스러운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수익을 내겠다는 의지가 그렇게까지 강한지 몰랐다. 그 후 훨씬 큰 수익을 냈지만 아직 매도 타이밍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D는 팔아야만 하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아쉬워 보였다.
나는 워낙에 T이기도 하지만 3n년의 인생을 '이 정도면 됐지'까지만 노력해 온 사람이라 더욱 해줄 말이 궁색하였다. 여기서 '이 정도면 됐지'는 A+을 노리지 않는 과제제출과 10킬로 감량을 목표로 하면 8킬로쯤에서 타협하는 행위 등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더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워 보여 황급히 마무리하고 퇴근하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A-도 대단하고 8킬로 감량도 기특하며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스스로가 따뜻하다.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굳이!) 진심을 외면하고 악착같이 무언가를 이루겠다 각성당해 본다. 어쩐지 기시감이 있는 각성이지만 이번에는 지독하게 다이어트에 매진해 보리라. 내일은 꼭 수영장에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