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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by 제법 Dec 29. 2024

내가 주로 활동하는 연남동은 꽤 핫한 곳이다. 맛집이 즐비하고 젠지들이 몰려와 기꺼이 웨이팅과 북적거림을 즐기고 간다. 길 건너 AK 빌딩은 어느 순간 애니메이션 성지로 자리 잡는 것 같더니 이제는 애니메이션 코스프레한 이들을 마주치는 것도 낯설지 않고 양화로 양옆 빌딩에 대형 게임 광고가 걸리는 일도 예사롭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은데 매일 아침 무렵 홍대입구 4번 출구에는 빨간 관광버스가 줄지어 입을 벌리고 대기하고 있다. 활동성 좋은 잠바에 운동화를 신고 항시 바빠 보이는 가이드와 눈을 마주치면 찰나나마 나도 여행지에 온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다. 

홍대입구 4번 출구에서 이어지는 AK빌딩 1층의 개방형 통로는 엄마의 최애 스폿이다. 이유는 단지 딸이 출퇴근 길 중 약 100여 미터를 눈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왠지 가슴이 뜨끈해져 회사에서 마음이 시큰해질 때면 지름길을 놔두고 그 길을 지나간다. 돌아가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운동을 더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자 어떤 형태로든 다이어트를 조력하는 어머니의 보우하심에 피식 웃음이 났다. 

거의 매일 지나다니는 그 통로에서는 주로 앞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애호가, 상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수도권전역에서 놀러 온 10대 이상의 내국인, 관광 온 외국인을 마주하였다. 작은 광장 같은 공간이라 인적이 드물 때면 저 멀리 콩알에서부터 온전히 사람으로 형체가 드러나는 순간까지의 시야가 꽤 영화적이다. 

오늘도 그 끝에서 3개의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 유색 인종, 외국인. 점점 인상착의가 또렸해졌다. 신난 실루엣과 부산스러운 시선이 관광객이구나 싶을 때쯤 한 명이 내쪽으로 쓰윽 다가왔다.

나는 흠칫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에 힘을 줘 몸을 뒤로 빼며 길을 멈췄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안경을 쓰고 총명하게 빛나는 눈빛(코딩을 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과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장착한, 20살쯤 되어 보이는 친구였다. 

못 알아들을 말도 아니고 따지자면 호감에 가까운 외국인이 길을 물으려는 것이 뻔한데 늘 그렇듯 오늘도 영어 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요"

그 친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한국말로 대답했다. 정말 안타깝게도 영어를 조금도 못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으면 하는 짐심을 담았다. 진의를 오해할 수 있도록 딴에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것이다. 미간도 갸륵하게 올렸으면 더 완벽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영어 울렁증. 나는 아직도 영어가 불편하다. 내 입에서 나오는 영어는 거대한 우주의 확성기를 통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들린다. 그 소리에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점점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치 내가 헬스장이나 새로운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 헬스장에 들어서면 가쁜 숨을 내쉬며 운동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활기찬 음악이 나의 잔잔한 텐션을 압도한다. 운동은 해보셨어요? 목표하신 게 있나요?처럼 보통의 질문을 친절하게 건네지만 왠지 모르게 쭈굴쭈굴해진다. 화룡점정은 회원권 사진을 찍을 때인데 머그샷을 찍는 것도 아닌데 뒤통수에 쭈뼛 소름이 돋는다. 헬스장 울렁증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가 말을 걸 때 생각했다.

'아 오늘 기분 마치 헬스장'


한국에 영어 잘하고 친절한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나를 마주쳤을까 미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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