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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Aug 19. 2020

정확하고 축축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셀린 시아마 감독의 <워터 릴리스(2006)>를 보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는 꽤나 다른 느낌이었다. 짧게 말해 이 영화가 나는 훨씬 좋았다. 그리고 두 영화를 종합적으로 봤을 때 셀린 시아마 감독이 가진 섬세한 시선과 표현력이 얼마나 독자적이고 강력한 무기인지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어서, 리뷰를 작성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글쓰기가 한없이 귀찮아져버린 지금에도 간단하게나마 감상을 꼭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글을 시작하게 됐다.

  디테일한 캐릭터 구축을 통한 각본 상의 상황 설정 자체가 좋았다. 영화상 시상 분야 중 ‘각본상’의 개념이 항상 모호하게 느껴졌었는데, 이런 작품이야말로 각본상을 받을 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세 주요인물 플로리안, 마리, 안나는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진, 셋 모두가 서로 다른 10대 소녀들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 명 소홀히 다뤄지는 인물이 없었다. 감독의 각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물론, 해당 나이대의 모든 청소년들과 그 삶, 그 하나하나의 특성들 전부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 감동스럽기까지 했던 부분이었다.


  어른이 된 이들도 마찬가지지만, 십 대는 그야말로 혼돈과 질풍노도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집에서,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로 모든 게 설명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세상과 나 자신은 언제나 어긋나는 것들 투성이고, 그런 모순들을 차분히 앉아 응시할 틈도 없이 차오르는 숱한 감정들은 휘몰아친다. 모두가 처절하게 물장구를 치고 있지만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완벽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서로의 얼굴들뿐이라, 저들과는 어딘가 좀 다른 것 같은 자기 자신의 이질감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숨기거나 가리거나 치장하기 바쁘다. 실은 원래 모두가 모두와 다른 것인데. 이처럼 예민한 시기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셀린 시아마의 시선은 그래서 약간 금이 가있거나 살짝 얼룩이 졌거나 조금 튀어나온 그들의 어떤 부분들을 디테일하게 잡아낸다. 허나 그 세심함은 날카로운 예리함이 아니라 정확한 애틋함이다. ‘정확하게 사랑하는’ 눈빛이다.

  플로리안과 마리와 안나는 결국 모두 자기 자신을 찾아내며, 기꺼이 다 알 수 없는 스스로의 편이 되어준다. 왠지 모르게 거절하고 싶은 것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왠지 모르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며 표현하는 방식으로, 왠지 모르게 짓밟힌 듯한 자존심에 복수하는 방식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누구든 평생을 안고 가야만 하는 숙제이지만, 저 사람이 원하는 걸 나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모두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상을 내가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나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조금 더 정확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작지만 알록달록하고 시원한 사랑과 승리들을 얻게 해줄 것이다.


  물 위의 모습과 물속의 모습이 정확하게 서로 대비된다는 점 때문에 수중발레라는 소재를 택했다고 감독은 밝혔지만, 그뿐 아니라 이 작품에는 그 덕에 온통 물이 가득하게 됐다. 물속에서는 때려도 아프지 않다. 물에는 몸을 맡길 수가 있다. ‘어떠한 것을 받아들임’을 뜻하는 ‘수용受容’이 ‘어떤 물질이 물에 녹는 것’을 뜻하는 ‘수용水溶’과 발음이 같다는 점이 왠지 재미있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당신이 옳다’는 말을 건네기는 쉽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이렇게 물기어린 애틋한 시선을 두 시간 동안 감상하는 일을 통해 ‘나도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서서히 느끼게 하는 것은 보다 진하고 부드러운 응원이요 포용이다. 못 봤던 감독의 다른 작품 <톰보이>를 얼른 챙겨봐야지. 나를 정확하게 고려해주고 축축하게 받아들여주는 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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