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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말의 진짜 무게

사진에 진심人

명절의 소란함이 지나고 나면, 우리 손가락은 익숙하게 안부 문자를 타전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몸 건강히 잘 지내시고요."


온갖 복을 기원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전송 버튼을 누른 그 찰나, 문득 서늘한 질문 하나가 마음을 할퀴고 지나갑니다. '나는 지금, 정말로 저 사람의 안녕을 이토록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볼까요? 우리는 때로 그 말을 건넴으로써 상대의 안녕보다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는 자기 위안을 먼저 챙깁니다.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숙제를 끝낸 영수증처럼, 그 한마디는 찝찝한 마음을 잠시 면제해 줍니다. 그의 건강은, 어쩌면 내 마음의 평안보다 몇 순위는 뒤에 있다는 씁쓸한 진실. 가족과의 '숙제'를 끝내고 예약해 둔 여행을 떠올리며 기뻐하는 제 자신을 볼 때면, 이 얼마나 투명하게 이기적이고 저열한가 싶어 쓴웃음이 나옵니다. 애써 합리화해 보지만, 저는 여전히 제 안의 원초적인 욕망과 기꺼이 악수합니다.


이 자기 고백의 렌즈는 삶의 가장 무거운 순간마저 비춥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자리,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릴까요? 당연히 슬퍼서입니다. 하지만 그 눈물의 성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거기엔 떠나간 이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선명한 자기애가 녹아있습니다.


그와 함께 쌓아 올렸던 나의 시간, 나의 추억, 나의 세계가 산산조각 나고, 더는 이어지지 못하는 나의 서사가 서러워 우는 것일지 모릅니다. 모든 감정의 화살표가 결국 '나'라는 과녁에 명중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 앞에 잠시 말을 잃게 되죠.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지독한 위선이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100% 순결한 이타심이란 어쩌면 신의 영역일 테니까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정직한 민낯일 뿐입니다.


다만, 이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이 공허하다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말없이 건네는 '몸의 성의'를 보이면 됩니다. 형식적인 안부가 민망하다면, "지난번에 허리 아프다셨는데, 이 파스라도 하나 붙여보세요"라는 구체적인 행동이 말의 무게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말의 잔치가 아니라, 마음의 실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유창하게 '말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의 가치 기준과 달리, 진실은 정반대를 가리킵니다. 타인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 그의 이야기에 자신의 에너지를 기꺼이 쏟아붓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진실이 왜 지키기 어려운지 아십니까? 그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닌,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듣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최근 누군가의 이야기를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당신을 비우고 진심으로 공감하며 들으려 애쓴 적이 몇 번이나 있으신가요?


그 침묵의 시간이, 어쩌면 우리가 평생 주고받는 공허한 말들보다 더 큰 위로와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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