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의 대가

열 번째 수업

by 아오리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다. ‘열 번의 수업이 언제 끝나나, 과연 유월이 오기는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는데…라고 쓰기에는 사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모두 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시작은 어렵지만 끝이 날 때는 아쉽고, 처음에는 난 별로 밥생각이 없어 했다가도 먹다 보면 맛있고, 첫인상이 별로였지만 알고 보니 츤데레더라 같은.


이 수업도 예외 없이 첫 만남은 어려웠지만, 헤어지려니 아쉽고 더 열심히 해볼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지.


유월, MFA에도 나부끼는 무지개 깃발 / 오늘 저 자리에는 어떤 분이 와서 앉으실까- 궁금궁금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항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마지막 인물화인데 어떤 스타일로 그려볼까 고민을 하다가 급하게 딸아이의 방에서 12색 색연필 한 세트를 들고 나왔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지만 없으면 못쓰는 거니까. 이전 여덟 번의 수업으로 인물화의 대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수업이니 무언가 만족스럽고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다. 마지막 날까지 어김없이 펼쳐보는 ‘대작을 향한 꿈‘.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어디에 앉을지를 고민했다. 구도를 고민하면서도 컬러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생각했다. 색연필을 사용해 본 지도 오래되었고 하필이면 집어온 색연필이 수채 색연필이라서 발색이 좋지 않았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용기를 넘어선 욕심은 ‘하루에 한 가지’만 부려야 한다. 새로운 구도, 새로운 재료, 새로운 접근 방식을 동시에 적용했다가는 정말 제대로 망하기 딱 좋았다. 마지막 그림인데 그럴 수는 없었기에, 고민 끝에 ‘오늘의 용기’는 컬러링에만 두기로 하고 몇 번 그려봤던 옆얼굴을 그리기로 했다.


나름 프로필을 정확하게 따낸 것 같은 스케치 / 하필 집어온 색연필이 수채화용이라니!!!


오늘 모델은 큼지막한 헤드폰을 쓴 젊은 여자분이셨다. ‘얏호! 귀가 안 보인다!!’ 눈, 코, 입 모두 미묘한 그 한 끗 차로 실제처럼 그려내기 쉽지 않지만 유독 ‘귀’를 그리는 것은 어렵게 느껴진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이랄까. 바깥면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또 안쪽에서 다시 바깥으로 빠지고, 선이 갑자기 면이 되고, 서로 복잡하게 빚어져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공부하기 싫은 과목’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 ‘귀’가 오늘 없다니, 오늘 아무래도 ‘대작’이 나오려나보다.

천천히 형태를 잡고, 비율을 나누고, 선들을 재서 스케치북에 옮겼다. 대강의 스케치가 나온 후 여러 가지 색연필로 각 부분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색을 쓰니 명암을 디테일하게 잡지 않아도 각 부분이 쉽게 구분이 되긴 했는데,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무 자르듯 정확한 한 가지 색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제한된 색으로 다양한 ‘또 다른 색‘을 만들어내야 했다. 발색이 아쉬운 색연필이긴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과감하고 거친 선들이 저절로 순화되었다.


파리했던 얼굴에 혈색을, 밋밋했던 머리카락에 광택을 더해보기!


어찌어찌 천천히 ’ 내 눈에 보이는 색’과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색’에 대해 고민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보라색을 섞어 썼더니 쿨톤 같은 모델의 투명한 피부가 잘 표현된 것 같았다. 반질거리는 머릿결도 ‘이건 왜 있는 건가’ 싶었던 금색, 은색 색연필로 마음에 들게 표현했다. 다만 개버릇 남 못주고 거친 선으로 급하게 마무리한 티셔츠와 머리 끝부분은 역시나 마음에 안 들었다. 정성을 들인 거친 선과 정말 그냥 거칠기만 한 선은 명백히 다르다.


자세히 잘 보면 볼패임과 턱근육까지 구현했다구요! 마음의 눈으로 잘 보시면 보인다구요! /. 자신을 그린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일까?


‘대작’까지는 아니었지만(과연 그럴 수가 있긴 한 걸까??!), 첫 색연필 인물화를 완성시킬 수 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마지막 크리틱을 마치고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데, 사실 나에게는 어제부터 생각하던 또 다른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같이 수업 들은 분들과 마지막 날 꼭 남겨왔던 ‘단체사진’이었다. ‘이걸 같이 찍자고 해? 말아??’ 아홉 번의 수업동안 모두 다정하셨고 두루두루 인사하며 잘 지냈지만, 사실 아주 특별하게 가까워진 분은 없었어서 선뜻 함께 사진을 찍자고 이야기를 하기가 고민스러웠다.


항상 이럴 때마다 결론에 가까워지게 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그건 바로 ‘안 해서 후회가 두고두고 더 클 것 같으면 그냥 해보자 ‘라는 것. 그냥 넘어갈까라고 생각한 순간, 집에 가는 순간 닥쳐올 ‘후회’의 무게가 느껴졌다. 모두 집에 가버리기 전에 결판을 내어야 했다. 힘껏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함께 이 수업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주변에 있던 수강생들까지 함께 흔쾌히 모여주셨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면, 생각보다 훨씬 더 반갑게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만, 그 손을 내밀기까지 나의 내면이 괜히, 혼자, 너무 복잡했을 뿐.


MFA에서의 정말 마지막 수업 기념 사진 /. 이건 2022년 여름, 첫 MFA 수업의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이라고 크게 용기를 두 번이나 내었다. 덕분에 ‘생애 첫 색연필 인물화’와 두고두고 꺼내볼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써놓고 보니 참 별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할까 말까’를 고민했던 그 순간에는 세상 가장 진지한 고민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매일 새로운 도전을 한다. 카페에서 매일 시키는 라테 말고 밀크티를 시켜보며, 생전 입어보지 않았던 색상의 옷을 구입하며, 매일 안부를 먼저 물어봐주는 친구에게 내가 먼저 연락하면서. ‘안 하던 짓 하면 탈 난다.’라는 세기의 진리를 거스르고 용기를 내어 살짝 비껴가볼 때, 우리는 간혹 정말 탈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새로운 기쁨과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조금 더 힘을 낸 대가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작은 용기들 덕분에 나도 MFA에서, 여섯 학기의 미술 수업을, 그리고 보스턴의 마지막 해를 정리하며 아홉 번의 인물화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다음에 내가 내어야 할 용기는 무얼까. 이렇게 ‘용기‘에 대해 쓰다 보니, 앞으로 닥칠 새로운 상황들이 덜 무서워진다. 이것도 낯 간지럽게 사소한 도전들을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를 낸 대가겠지. 이 정도 대가라면 충분히 가치 있지 않나요?


복도에서 이리 찍은 걸 보니 이때도 꽤나 고민하다가 ‘사진 찍을래?‘ 했나보군… /. 수업을 인연으로, 이후에도 종종 만나 갤러리에서 함께 그림 그렸던 Susan(중앙의 체크셔츠)


마지막 수업을 기념으로, 나에게 주는 선물! MFA Shop에서 좋아하는 그림 엽서 잔뜩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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