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수업
지난주, 별 다섯 개의 시급성과 신중함을 요하는 결정을 해야 했다. 한 주 동안 플랜 A, 플랜 B, 플랜 C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장단점을 비교하고 조사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너무 생각할 것이 많으니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한 주 동안 고심하는 시간을 거쳐 결정을 내리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야 할 일들로 관심을 넘기며, 역시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맞이한 MFA 수업이 있는 월요일, 한산한 미술관은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흙탕물 같은 나의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했다.
스튜디오에 갔더니 모델분께서 이미 선생님께 지도받으신 포즈로 앉아 계셨다. 이제는 모두 수업 진행 방식에도 익숙해졌고, 항상 시간은 부족하기 마련이었기에 수강생 모두 자리를 잡자마자 그림을 그려내기 바빴다. ‘이렇게 부딪쳐 그려낸다고 뭐가 나아지는 게 있긴 할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기본 비율을 지켜 스케치를 하고 거기에 모델만의 개성을 담아 디테일을 그려나가는 과정들이 이제는 확실히 편안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 듣는 코멘트와 다른 수강생들의 그림을 보는 것도 스스로 그다음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이제까지의 수업과는 사뭇 다른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잘 시작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기에, 오늘은 기필코 ‘대작’을 그려내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갖고.
그렇게 인물의 얼굴에 집중하며 그림에 매달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 그림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모델은 뒤쪽 캐비닛에 머리를 기댄 포즈였다. 모델의 얼굴에만 집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그녀의 머리 뒤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도 그림의 일부야. 저 부분이 그림을 더 특별하고 인상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아… 그림자. 모델이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구나!‘ 선생님의 이 말씀은 ’ 인물화‘이기에 모델의 얼굴을 실물과 가깝게 그려내려고만 애쓰고 있던 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 얼굴만 사진처럼 똑 닮게 그려냈다고 해서 그게 좋은 그림은 아니지.
그림에는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있다. 색을 잘 써서, 붓의 터치가 멋있어서, 구도가 인상적이어서, 소재가 특별해서, 인물들의 표정이 재밌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그 그림만의 개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 많은 요소 중, ’ 그림자‘도 있었다. 가장 어두운 부분이지만 밝은 부분을 더 밝게 보여주는 힘을 가진다. 강한 대비에서 오는 다이내믹한 화면의 변화도 그림자만이 가진 힘이다.
사실 나에게 항상 ‘그림자’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였다. ‘모든 일에는 다 장단점이 있지’라고 말할 때 ‘단점’에 해당되는 부분 같달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고, 없다면 더 좋은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그림자도 ‘그림의 일부’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림자는 어쩌면 꼭 필요한 ‘인생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어 타는듯한 여름의 정오, 잠시 몸을 식힐 한쪽의 그늘조차 없다면 얼마나 몸도 마음도 타들어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 길게 드리워진 어떤 그림자들은 그 실물을 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마음들을 더 잘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주 내가 맞닥뜨린 문제가 지금까지는 마치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서 나의 시야 안으로 훅 들어온 그림자 같이 느껴졌었다. 한 번씩 갑자기 나사가 풀려 축 처져버리는 거실 램프처럼 내가 다시 램프를 일으켜 그림자를 치워버릴 건지 아니면, 이참에 새로 생긴 그림자 덕분에 더 밝게 보이는 부분으로 시선을 돌려볼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그 이후의 것들을 고민하면서 한 가지 내가 굳게 갖는 믿음은, 어찌 되었든 ’ 그림은 완성된다 ‘는 것이다. 어떤 것에 포인트를 두고 그렸느냐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는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그림은 완성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하던 대로, 방향을 잡은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나가면 된다. 그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