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사실 이 수업이 MFA의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은 몰랐다. 가을 학기에 좋아했던 ‘Pen and Ink’ 수업을 다시 한번 듣고 4년간의 MFA Art Class 수강을 마치려고 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네 인생.
좋아하는 수업을 한 번 더 듣지 못해서 아쉬운 것보다는, 두려운 마음에 선뜻 등록하기 망설였었던 이번 ‘Portrait Drawing‘ 수업을 한 번 들어봤다는 것에 더 큰 만족감이 든다. 임계점을 지나 이미 만족한 것에 즐거움을 한 스푼 더하는 것보다는, 궁금했지만 선뜻 도전하기 어려워 흐린 눈으로 모른 척하던 과제를 해치운 것이 더 ‘완성형’에 가까운 행복처럼 느껴진달까?
MFA에서 미술 수업을 듣는 것은 잊고 있었던 ’나’를 재발견하게 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중학교 때까지 방학 때마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대학 때도 화실에 잠깐 다니기도 했었던 ‘나’를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갤러리에서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할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 (최선을 다했지만) 명화를 내 맘대로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말랑해지는 마음도 덤으로 따라왔다. 매주 MFA를 오가며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대학 때 들었던 ‘명화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을 좋아했었던 ’나‘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MFA 수업에 가는 것은 내가 애써 만들어낸 ‘일상의 루틴’이기도 했다.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는 미국에서 나에게 정해진 일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가 나가고 나면 그 이후의 시간들은 오롯이 혼자만의, 비어있는 것이었다. 망망대해 같은 이 시간에 그저 둥둥 떠 있을 수는 없었다. 하나의 부표처럼 박아놓은 일주일에 하루 두 시간 반의 미술 수업.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이 시간에 나는 내가 만난 새로운 세상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서로 다른 그림 스타일로 문화 차이를 혼자 가늠해 보고, 짧은 영어를 몇 마디라도 던져 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명화들이 가득 걸린 갤러리를 원 없이 돌아다니며 호기심을 채웠다.
수강생들 속에서 보기 드문 ‘단기 거주 동양인‘으로서 스스로 위축되고 낯설었던 마음도 잠시, 매 학기 수업을 들을수록 사람들과 친해지는 나름의 요령도 생기고 이 ‘낯 섬’ 속에서 어떻게 내가 자리를 잡아야 할 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속도로 새로운 환경에도 점차 적응해갈 수 있었다.
이번 인물화 수업을 들으며 사람을 관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이제껏 한 사람을 두 시간 반 동안 조목조목 뜯어보며 관찰해 본 경험이 있었을까? 매주 새로운 모델들과 만나면서 문득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런데 나는 어떻게 생겼더라?‘였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나의 얼굴을, 나의 취향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나에게로 다시 되돌아왔다.
MFA에서 찾아낸 ‘나’에 대한 실타래를 이제 어디로 던지면 좋을까? 잘 싸매고 있다가 한국 어딘가로 또 굴려봐야지. 이번에는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려냐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