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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Mar 30. 2022

엄마, 그 상실감의 무게

그림책의 태도

  그림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를 사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의 고된 삶에 그림책을 읽는 것의 의미가 더 크다고 느끼는 것은 그림책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다투고, 잃고, 헤어지고, 또 슬퍼도 세상을 등지지 않는 것. 애정을 담아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 차이가 아이들과 또 어른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마, 그 상실감의 무게>

  그림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엄마’였다. 수많은 그림책이 엄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이에게 엄마가 세상의 너비만 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BTS의 노랫말처럼 아이에게 엄마는 ‘You are my universe’이기 틀림없기에,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다.

-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

  어부인 아버지가 바다로 나간 사이, 엄마는 늘 바닷속 깊은 곳에 이야기를 해주신다. 인어아가씨, 바다 트롤, 정어리 거인… 바다에 나가본 적도 없는 엄마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아버지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 아버지가 숨겨놓은 바다표범 가죽을 찾아낸다. 그것이 아버지 것인 줄 안 아이는 엄마에게 이를 말하고, 엄마는 다음날 영영 사라져 버린다.

  마치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듯한 이 이야기는 엄마가 떠난 뒤, 남은 아빠와 아이의 시선에 집중한다. 아이는 비정한 현실에도 아빠와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알지 못하지만, 죄로 여겨지는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인 걸까. 책의 말미에는 정어리 두 마리와 바다표범이 되고자 하는 아이를 해변가에 나란히 세우며, 그 헤아릴 수 없는 상실감의 깊이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선택과 아이의 선택, 그리고 엄마의 선택에 따른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 뒤에 순수하게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가 서 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을 보는 듯하다. 어른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 아이에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로 상처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언어와 사회와 환경과 아이들이 누릴 모든 세상에 면면에서 우리는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에게 엄마를 앗아간 것은 세상을 앗아간 것이고, 그것은 아이의 꿈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는 세상을 잃은 후에도 꿈을 꾼다. 아무리 세상이 검은 바다 같을 지라도, 바다를 누비는 자가 되고자 한다. 순수한 열망으로 비정한 현실을 넘어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 엄마의 품

  물심부름을 가던 내가 장마를 만난 날. 집으로 돌아갈지, 엄마를 향해 달리지 고민하던 나는 빗길을 헤치고 엄마에게 간다. 꾸중을 하던 엄마는 이내 넓은 품으로 나를 안고, 나는 이 날을 잊지 못한다.

  평화롭게 논길을 걷던 내가 장마를 만난다. 장마는 나를 엄마에게 달려가게 한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이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평화로운 시간들을 지나 장마를 만났을 때, 생각나는 것은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름 만으로 힘이 되는 것, 달려 안기길 소망하는 것, 장마를 만났을 때 피해 도망가는 그곳, 엄마의 품. 이 그림책은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들어가 쉴 곳을 알려주고, 엄마가 영영 떠나고 없을 때, 갈 곳 잃은 발길을 붙잡고 눈물 흘리게 할 것이다.

- 알사탕

  아빠와 동동이(개)와 살고 있는 나는 문방구에서 우연히 알사탕을 사게 된다. 신기한 알사탕은 하나를 먹을 때마다 대화할 수 없었던 상대와 대화를 하게 해 준다. 소파, 동동이,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아빠까지.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이 전하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결국 나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어, 새로운 친구에게 손을 내민다.

  백희나 작가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알사탕’은 그 유명세에 걸맞게 손에 꼽히는 수작 임에 틀림없다. ‘이상한 손님’, ‘이상한 엄마’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에 혼자 남아있는 내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을 앓아가는 데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알사탕이라는 매개체는 어쩌면 아이에게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도 사랑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혼자 있고, 외롭고, 어른들의 마음도 알지 못하지만, 아이는 그 마음에 닿아있다. 사물의 기분을 살피는 어리석은 짓은 더는 하지 않는 어른이지만, 어쩌면 그러한 아이의 시선이 우리가 살피고 보살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물도 동물도 더욱이 사람도 애정을 가지고 살피고,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이를 성장하게 한다는 것.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 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엔 사랑이 한 일이라는 것. 나도 그 마음에 가닿는다.

- 엄마의 의자

  엄마와 할머니와 살고 있는 나는 유리병에 동전을 모은다. 화재로 타버린 집에 소파 하나를 사기 위해서다. 침대도 카펫도 주변 이웃들이 모두 마련해 주었지만, 소파는 구하지 못했다. 오래 힘써 모은 끝에 소파를 사게 된 우리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불을 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불타버린 세간살이를 대표하는 소파는 결국 우리가 앉아 책을 읽고, 불(전등)을 끄는 데 사용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운율인지. 수미상관을 이루는 시처럼 이야기는 멋지게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에서도 삶은 팍팍하고, 어렵다. 하지만 이웃들의 나눔과 공동체의 격려, 가족들의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그들은 행복을 잃은 적이 없다. 그저 불행한 사고를 맞았을 뿐. 그저 지나가는 장마처럼,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살아가면 그뿐인 것이다. 다만, 그 과정 가운데 사랑과 노력의 흔적들이 함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저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불행이라 여기고, 행복은 잃은 적 없다는 듯이. 멋진 영웅처럼.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불은 생각보다 쉽게 꺼질지도 모르니까. 후. 하고 크게 불어버리자. 비가 내려줄 것이다. 나의 의지와 삶의 미스터리가 만나 삶은 살아질 것이다.


엄마와 상실을 그린 이 이야기들은 결국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어렵고 힘들 때, 엄마를 찾고, 아이처럼 울어도 보지만, 결국에 우린 엄마에게 배운 대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그 애정 어린 태도가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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