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나 혼자, 돈가스와 마주 앉았다
첫째를 낳고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함께 첫째를 돌봐 주셨고, 나는 육아 휴직 기간이 약 3주 정도 남았던 시점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첫째 아이가 자고 있던 11시 무렵, 갑자기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인내성하면 남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집안 공기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내가 질식될 것 같은 공포감마저 들었다. 나는 화장도 하지 않고, 털모자에 고트를 챙겨 입었다. 입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 어머니, 아기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무작정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나를 잡고는 왜 그러느냐고 물으셨지만, 그냥 울면서 뛰쳐나왔다.
불러둔 콜택시를 탔고, 택시는 집에서 멀어져 갔다.
남편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그런데 받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싶었다.
결국 밖으로 나왔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작은 시골 동네라 학부모들 눈에 띌까 조심스럽기도 했다. 결국 5분 거리에 있는 양식집에 가서 돈가스를 시켰다.
조금 전에 눈물은 흘렸지만, 돈가스를 안 먹는 풍경이 식당과 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낮에 혼자 와서 돈가스를 시켜 놓은 풍경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그 시간 나 혼자, 그렇게 돈가스와 마주 앉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맛있게 먹었다. 그때는 정말 내 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돈가스에 주스까지 먹고 나니, 이제는 정신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에게선 계속 전화가 왔지만, 이제는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식점에 계속 머무를 수 없어 가게 아래에 있는 노래방에 가려고 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향한 곳은 한의원이었다. 당시 아이를 낳고 무릎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의사 선생님은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몸이 미처 다 되돌아오기 전에 침을 맞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찜질만 하고 가라고 하셨다. 한의원에 누워 있는 그 짧은 시간의 따뜻함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첫째 걱정이 되었다. 수유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의원에서 나와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는 돈가스를 맛있게 먹었지만, 남편에게는 먹지 않은 척했다. 가출과 돈가스는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편은 나를 데리러 왔고, 집에 가서 밥을 다시 조금 먹고, 수유를 했다. 엄마의 가출 사건을 모르는 첫째는 나를 보고 계속 방긋 웃었다. 순간, 내 가슴을 짓누르던 삶의 체증이 내려갔다.
2시간의 짧은 가출, 정말 갈 곳 하나 없고, 그 누구에게라도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었다. 그냥 힘들다고, 이유를 딱히 댈 수는 없지만, 나를 짓누르는 그 무게감이 견디기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 때 친정 식구들한테 얘기할 용기도 없었다. 나는 친정 식구들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것이 어쩌면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당시 힘든 일이 있었겠지만, 아기를 낳고, 내 몸처럼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내는 것이 왠지 힘들게 느껴졌다. 다행히 그런 시간은 남편의 배려로 그리고 첫째의 방긋 웃는 미소로 가벼운 운동으로 그리고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잘 넘어갔다.
아이들은 모르는 엄마의 짧은 가출 사건. 그래도 짧은 일탈 덕분인지 그 이후에는 그리 답답하지 않게 보냈다. 어쩌면 추운 겨울철이라 그 좁은 집이 더 갑갑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에 잠깐 겨울이 찾아와서 힘들고 춥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삶은 때론 내가 견디기 힘든 어려움으로 나를 흔들고 지나간다. 그때 내 나이 서른이었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가사처럼 '비어 가는 내 가슴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내 삶의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이 내 삶의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금씩 더 단단해져 갔고,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30대를 시작했다.